글. 혜연

인정하기 싫지만, 현대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명예나 권세, 부를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결국 개인의 ‘신분 상승’이라는 거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 시대와 지역, 동서양을 막론하는 이 욕망은 이미 수많은 영화들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응시해왔다. 그들의 여정은 달콤하고 통쾌하지만, 때로는 씁쓸하고 허무하다. 그렇다면, 유약한 인간의 평생 욕망인 ‘신분 상승’에 도전한 배우들은 누가 있었을까. 전혀 다른 사회적 위치에서 보여준 이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해당 작품의 매력이다. 연초의 야망을 가득 담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아래 작품들을 소개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 오드리 헵번

이미지: 파라마운트 픽처스

부유한 남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화려한 신분 상승을 꿈꾸는 홀리의 이야기를 그린 [티파니에서 아침을].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세련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며,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이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홀리는 인간적인 동시에 호화로운 상류층을 동경하기 때문에 현실 앞에서 깊은 괴리감을 느낀다. 보석상 ‘티파니’를 서성이며 가난한 청년의 사랑을 외면하는 홀리의 모습을 통해, 뉴욕 상류 사회에 진입하기를 열망하는 밑바닥 인생의 삶과 애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젊은이들의 무력감과 상실감, 피할 수 없는 빈부격차 등 대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오드리 햅번의 ‘문리버’는 답답한 현실에 작은 오아시스로 다가온다.

리플리(1999) / 맷 데이먼

이미지: 파라마운트 픽처스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던 청년 리플리가 호텔 보이에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가짜 인생을 살아가는 [리플리].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정신적 상태 ‘리플리 증후군’을 소재로 한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리플리는 남의 말투, 필체를 기막히게 흉내 내고, 거짓말을 감쪽같이 할 수 있는 재주를 이용해서 남의 인생을 훔쳐 가는 인물이다. 막대한 재산, 아름다운 여인, 달콤한 인생, 자유와 쾌락이라는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상류층 옆에서 리플리 또한 그 일상에 서서히 도취되지만, 이 위험한 욕망은 거대한 파국을 만들어낸다. 원작이 되는 동명의 소설은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먼저 영상화되었고, 1999년의 [리플리] 또한 앞선 수작에 못지않게 호평을 받았다. 영화 속에는 수많은 재즈 명곡들이 등장하며, 맷 데이먼이 쳇 베이커를 흉내 내며 ‘My Funny Valentine’을 부르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위대한 개츠비(2013)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혼란한 192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화려한 부자들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환상과 배신, 그리고 타락해버린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집필한 세기의 고전을 현대의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의문의 백만장자 개츠비는 현재의 사랑과 과거의 영광을 쟁취하려 분투하지만, 욕망이 집착으로 번져 결국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그의 사랑은 위험하고 매혹적인 재즈를 연상케 하고, 화려하게 빛나던 재즈 시대에도 폭력과 죽음, 비극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면을 알려준다. 그가 정말로 위대하냐 묻는다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질 것이다.

더 킹(2017) / 조인성

이미지: (주)NEW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폼 나게 살고 싶었던 태수가 세상의 왕으로 올라서는 이야기를 그린 [더 킹]. 조인성이 연기한 박태수는 목포 싸움꾼 출신 검사로, 대한민국을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설계자 한강식을 만나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소시민이었던 그가 험난한 정치판에 발을 들이면서까지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이유는, 대한민국처럼 권력자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격동의 시절을 겪은 우리의 현대사가 우아하고 클래식하게 펼쳐지며, 동시에 촌철살인의 대사로 해학과 풍자를 녹여낸다. 영화는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가장 올곧은 답변을 던지며 막을 내린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 엠마 스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절대 권력을 지닌 여왕 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하녀 애비게일과 권력의 실세 사라가 권력 다툼을 펼치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를 연출한 요르모스 란티고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서늘하고 비정한 궁중 암투를 블랙코미디로 재해석했다. 배경은 18세기 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앤 여왕 재임 시절로,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의상과 분장은 그 시대를 더욱 실감 나게 한다. 엠마 스톤이 연기한 애비게일은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하녀로, 세 여인 사이에서 최하위 계급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기에 히스테릭한 여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 친다. 또한 궁중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질투, 기만, 욕망, 치정의 관계성이 요르모스 란티고스 감독만의 방식으로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기생충(2019) / 송강호

이미지: CJ ENM

극과 극의 삶을 사는 두 가족의 희비극을 그린 [기생충].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를]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난 봉준호 감독의 7번째 장편 영화로, 그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안겨준 영화다. 수많은 수상 기록과 흥행 기록을 세우며 한국 영화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보여준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악인이 없으면서도 비극이고, 광대가 없는데도 희극’이라고 소개한다.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은 여러 사업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가장으로, 부유한 저택에 위장 취업하며 상류층과의 공생을 꾀한다. 하지만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인물이라기엔 아들보다 계획이 없고, 이따금 허당끼까지 보여준다. 온 가족이 전원 백수인 기택 가족이 바라는 것은 그저 ‘같이 잘 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지하 집에서 언덕 위 저택에 오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여정은 가파른 계단만큼이나 위태롭고 불안하다. 왕도, 대통령도, 재벌가도 아닌 ‘평범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힘겨워진 현시대를 기택의 표정으로 날카롭게 풍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