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나이를 잘 먹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설경구는 변화무쌍하게 연기 변신을 해왔다. 시대를 관통하는 고통의 비명 속에도,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캐릭터 속에도, ‘지천명 아이돌’을 탄생시킨 뜻밖의 신드롬 속에도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 생활 25년 만에 연기 인생 2 막을 맞이했던 그는 끊임없이 배우로서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올해 역시 그의 활약은 계속될 듯하다. 쉴 틈 없이 바쁘다. 1월 개봉한 첩보 액션 영화 [유령]을 비롯해, 삼례 나라 슈퍼 강도치사 사건의 실화를 그린 [소년들], 달 탐사를 소재로 한 SF 영화 [더 문], 넷플릭스 오리지널 액션 영화 [길복순], 허진호 감독의 신작 [더 디너]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팔색조 변화구의 모습을 이어갈 예정이다. 매 영화마다 대체할 수 없으며, 압도적이고 무시무시한 연기를 보여주는 설경구의 대표작들을 만나보자.

박하사탕(2000) / 김영호 역

이미지: 이스트 필름

다시 시작하고 싶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마흔 살 남자가 순수했던 스무 살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과 설경구의 첫 번째 만남이었으며, 설경구가 꼽은 자신의 대표작이다. 그가 연기한 인물 김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절규와 함께 1999년 봄에서 94년 여름, 87년 봄, 84년 가을, 80년 5월, 79년 가을로 시간을 역행한다. IMF 외환위기에서 출발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영화는 순수한 청년에서 파괴당한 중년으로 변질된 영호의 인생을 반추하며, 시대의 비극이 한 인간을 어떻게 오염시켰는지 작품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빼놓을 수 없는 한국영화의 명작이며, 설경구에게는 대종상 신인상,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등 10개가 넘는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이다.

공공의 적(2002) / 강철중 역

이미지: 시네마 서비스

지독한 형사와 악독한 범인의 끝없는 대결을 그린 [공공의 적]. 설경구는 극악무도한 살인마에 맞서는 불량 형사 강철중 역할을 맡아, 유례없는 한국형 안티 히어로를 탄생시켰다. 강철중은 깡패보다 더욱 깡패 같고, 무책임하며 불성실하지만, 진짜 나쁜 놈들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이다. 수많은 범죄 영화에 등장하는 ‘꼴통 형사’의 원조인 셈이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이 나뻐.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다” 같은 그의 통쾌한 대사와 행동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후 강철중의 활약을 그린 속편 [강철중: 공공의 적 1-1]까지 제작되었다. 연출을 맡은 강우석 감독과는 [실미도]에서 다시 협업하였고, 한국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오아시스(2002) / 홍종두 역

이미지: 이스트 필름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남자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여자가 사랑을 시작하는 [오아시스]. 교통사고 뺑소니로 형을 살다 출소한 종두가 피해자의 딸이자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를 만나며, 자신들을 소외시킨 세상 속에서 오직 둘만의 오아시스를 만들어간다. 한국 사회가 치부라고 여기며 외면했고,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추방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결코 ‘타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절박하게 전하는 작품이다. [박하사탕]에 이어 이창동, 설경구, 문소리가 다시 만났고, 이 결과 참혹하고도 애틋한 멜로드라마가 완성되었다. 두 배우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날것인 [오아시스] 속 인물들을 본능적으로 연기해 내며 춘사영화상, 베니스 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 한재호 역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각자의 이유로 불한당이 된 남자들의 의리와 배신, 사랑과 야망을 그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교도소에서 의리를 나눈 재호(설경구)와 현수(임시완)가 함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의기투합하던 중, 숨겨왔던 야망을 조금씩 드러내며 미묘한 관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설경구가 연기한 한재호는 범죄조직의 일인자를 노리는 인물로, 잔인한 승부 근성을 지닌 위험하고 강인한 남자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설경구 연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작품으로 꼽힌다. 슈트와 포마드를 소화하며 섹시한 중년미를 뽐낸 것은 물론,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강렬한 액션을 선보였고, 짙은 브로맨스를 보여주며 신드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의 PS 파트너]를 연출한 변성현 감독은 고전 느와르 장르에 자신만의 재치와 패기를 녹여냈고, 두 사람은 이후 [킹메이커], [길복순]을 통해 다시 만난다.

살인자의 기억법(2017) / 김병수 역

이미지: 쇼박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설경구는 주인공 김병수 역할을 맡아,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젊은 시절부터 알츠하이머에 걸린 50대 후반의 모습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소화한다. 이 과정에서 몸무게, 나이까지 마음대로 조절하는 노련함을 보여줬다. 또한 과거와 현재,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완벽히 표현하며 극도의 서스펜스와 스릴을 선사했다. 깊이 있는 주제와 빠른 호흡, 거듭되는 반전, 서스펜스와 결합된 유머 등 장르적인 재미가 돋보였던 원작 소설을 과감하게 각색한 것이 관전 포인트이다.

유령(2023) / 무라야마 쥰지 역

이미지: 더램프

1933년 경성, 항일조직의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고 외딴 호텔에 갇힌 5명의 용의자가 서로를 향한 의심과 경계를 뚫고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유령]. 일제강점기 배경의 첩보 액션으로 시작해 추리극의 장르를 깨부수고 나간다. [천하장사 마돈나], [독전] 등을 연출한 이해영 감독의 작품으로, 중국에서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설경구가 연기한 무라야마 쥰지는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으로, 용의자이자 ‘유령’을 잡아내고 화려하게 지휘부로 복귀하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적인지 동료인지 구분하기 힘든 설경구의 포커페이스가 인상적이다. 여기에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 서현우가 각자 다른 이유와 진짜 속내를 가진 ‘유령’을 연기하며 의심과 반전, 대립과 연대를 통해 뜨거운 캐릭터 앙상블을 펼친다. 이들의 역동적이고 절박하며, 뜨겁고 통쾌한 투쟁이 다이내믹하게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