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주)쇼박스

2023년 3월 8일 국내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등을 흥행시킨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이다. 빛을 가장 아름답게 활용하며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더욱 화려하고 화사해진 영상미를 선사한다. 또한 감독이 직접 집필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더 정밀하고 세밀한 캐릭터 설정과 세계관 구축에도 성공했다. 그야말로 신카이 마코토 세계관의 집대성이란 찬사를 얻고 있으며,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전무후무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스즈메의 ‘문단속’

이미지: (주)쇼박스

[스즈메의 문단속]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스즈메의 ‘문단속’ 이야기이다. 등굣길에 아름다운 청년 ‘소타’와 스쳐간 ‘스즈메’는 “문을 찾고 있다”라는 그의 뒤를 쫓아 산속 폐허에 들어선 후, 붕괴에서 빗겨난 듯 덩그러니 남겨진 낡고 하얀 문을 발견한다. 그 너머에는 저세상에서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재앙 ‘미미즈’(지진을 일으키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문을 열어 버린 스즈메는 재난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어 버린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가문 대대로 문 너머의 재난을 봉인하는 소타와 함께 일본 곳곳의 열린 문을 찾아다니기로 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화를 ‘히로인의 액션 활극 영화’라고 공언했었다. 강철 체력을 가진 스즈메는 넓은 일본의 영토를 헤집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문과 문 사이를 넘나든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버린’ 스즈메였지만, 사실 그는 거대한 재난의 피해자였고 이 모험은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스즈메의 ‘꿈’이라는 것 또한 이것이 회복과 치유의 여정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어린 스즈메는 재난 속에서 홀로 초원을 헤맸었지만, 여정을 거친 후의 스즈메는 불가사의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 자신을 구해낸다. 그러므로 스즈메는 지상을 위한 히로인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히로인이다. 이것이 감독이 말했던 ‘해방과 성장’의 서사일 것이다.

이 험난한 문단속 여정에서, 수수께끼의 고양이 ‘다이진’의 무시무시한 저주에 걸린 소타는 무려 ‘의자’로 변해버린다. 통제가 불가능한 모습으로 변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소타는 자유가 없는 장소나 시대에 포박당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감독의 우려대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채, 이 나라가 쇠퇴해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허무함과 폐쇄감이 녹아 있는 것이다.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며, 심지어 다리도 하나 없는 이 의자는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 줄도 모른 채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세 발 달린 의자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양이 처음에는 낯설고 우스꽝스럽겠지만, 금세 그 귀여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장소를 애도하는 이야기

어이없게도 귀여운 의자와 큰 눈을 가진 말하는 고양이뿐 아니라, 문을 열면 펼쳐지는 현실 너머의 세상과 마지막 전투를 펼치던 놀이공원, 피어오르는 재앙의 기운과 쓸쓸하게 방치된 폐허 등 애니메이션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시각적 요소들이 한껏 등장한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등 웰메이드 작품을 탄생시켰던 베테랑 제작진이 보여주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연출이다.

그중에서도 ‘문’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다. 문은 아주 일상적인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가장 멀어질 수도 있는 신비한 경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스즈메 또한 문 뒤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세계에 단숨에 홀려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순간, 소타는 그곳을 동경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승에 있는 우리가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말과 함께. 처참해 보이는 이승보다 차라리 저승이 평온해 보일지라도, 사람의 온기와 숨결이 살아 있는 땅은 지금, 이곳밖에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감독은 한국 드라마 [도깨비]를 언급하며 문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고 했지만, 차원을 이동하는 문은 [도라에몽]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이미 많은 판타지 장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다소 진부한 상징이 되어버린 ‘문’에 ‘기억’이라는 새로운 설정을 더했다. 폐허의 문을 닫는 스즈메는 그곳에 어떤 일상이 존재했는지를 치열하게 상상해낸다. ‘좋은 아침’, ‘다녀오겠습니다’ 등의 일상적인 인사가 전부이지만, 재난을 겪은 이들은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버려진 풍경들과 버려진 기억들, 잊힌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고, 위로하며, 애도하는 것이 바로 스즈메의 역할인 것이다.

무력함을 이겨내는 다정함

이미지: (주)쇼박스

로드 무비의 주인공답게 스즈메는 규슈, 시코쿠, 고베, 도쿄까지 일본 전역을 자전거, 신칸센, 자동차 등을 타고 돌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낯선 이들과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스즈메를 곁에서 보살피는 이모뿐 아니라 따뜻한 집과 밥을 제공해 준 에히메의 쾌활한 동갑내기 소녀, 홀로 어린 쌍둥이를 키우는 고베의 경식당 주인 마담, 빨간 스포츠카와 의리를 가진 도쿄의 소타 친구, 토지시 스승이었지만 현재는 병원에 입원 중인 소타의 할아버지까지. 그들은 ‘가출 소녀’로 보이는 스즈메를 외면하지 않고 돕는다. 심지어 스즈메의 이모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스즈메를 딸처럼 보살펴왔고, 빌려준 돈을 받아야 한다던 소타의 친구는 사실 친구를 많이 걱정하는 것이었다.

‘해피엔딩을 만들 수 없는 작가’라는 고정관념에 시달렸던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부터 관객이 영화를 보고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의 결말에서 감독의 이러한 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전작들에서 빛과 색, 속도 같은 은유적 연출을 통해 희비를 표현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들 간의 따뜻한 관계성과 적극적인 대사들이 돋보였다. 세상이 중심 없이 흔들릴수록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재난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무력함을 이겨낼 만큼의 다정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