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김종관 감독의 단편작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짝사랑하는 선배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물어보던 소녀 정유미는 원조 독립영화 퀸이다. 이후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012], [연애의 발견]에서 ‘주열매’, ‘한여름’으로 분하며 사랑스러운 로코 퀸 ‘윰블리’로 거듭났다. 주로 [옥희의 영화], [더 테이블]과 같은 드라마 장르에서 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지만 때때로 [부산행],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과감한 연기 변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2023년 9월 개봉한 미스터리 공포 영화 [잠] 또한 정유미의 필모그래피에 없었던 색다른 장르이다. [잠]에서 정유미는 이선균과 호흡을 맞춰, 수면 중 이상 행동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빠진 신혼부부를 연기한다. 그가 선사하는 공포는 어떨지 기대하며, 늘 전무후무한 신선함을 선사하는 정유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본다.
[사랑니] (2005) / 조인영 역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머금고, 새롭게 시작되는 또 하나의 눈부신 사랑을 그린 [사랑니].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서른 살의 수학 강사 ‘인영’(김정은)은 자신의 첫사랑을 꼭 닮은 17살 학생 ‘이석’(이태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행복해진 두 사람 앞에 17세 여고생 ‘인영’(정유미)이 나타나며, 이들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진다.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에서 정유미는 김정은의 아역을 연기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땋고 교복을 입은 모습은 말갛고 해사한 소녀 그 자체이다. 이 작품으로 정유미는 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본인 스스로도 이 영화를 직업 배우로서 데뷔작으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매우 의미 있는 영화임을 밝혔다.
[도가니] (2011) / 서유진 역

광주의 한 청각장애학교에서 실제 발생한 장애아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 ‘강인호’(공유)는 청각 장애인 학교의 기간제 교사가 된다. 한 청각 장애아가 기차에 치여죽는 사고가 나지만, 이를 쉬쉬하는 모습이 자행되던 구타 및 성폭행과 연관이 있음을 느낀다. 이후 인권운동을 하고 있던 ‘서유진’(정유미)과 힘을 합쳐 재판을 열기로 한다.
2000년부터 5년간, 청각장애아를 상대로 교장과 교사들은 비인간적인 성폭력과 학대를 저질렀다. 2011년 [도가니]를 통해 대한민국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였다. 인권운동가 역할을 맡은 정유미는 실제 사건의 중압감을 느끼며 연기에 임했고, 진심 어린 열연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도가니]를 통해 처음 만난 공유와는 이후 [부산행], [82년생 김지영], [원더랜드]를 통해 재회하게 된다.
[우리 선희] (2013) / 선희 역

구석에 몰린 선희와 선희를 아끼는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우리 선희]. 영화과 졸업생 ‘선희’(정유미)는 오랜만에 학교에 들린다. 평소 자신을 예뻐하던 ‘최교수’(김상중)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문수’(이선균), 나이든 선배 감독 ‘재학’(정재영)을 연이어 만나고, 그들은 선희에게 ‘삶의 충고’란 걸 해준다. 선희는 나흘간의 나들이를 마치고 떠나지만, 남겨진 남자들은 ‘선희’란 말을 잡은 채 서성거린다.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에서 정유미는 조금은 내성적인 선희를 연기했다. 실제로 엄청나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정유미의 성격과 닮아 있다. 안목이 아주 좋고, 용기도 있고, 가끔은 귀여운 사고도 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것까지 닮았는지 모른다. 복합적이고 미스터리한 선희 캐릭터는 정유미가 즉흥적인 연기 본능을 발휘하기에 최적이었고, 이 작품으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부산행] (2016) / 성경 역

서울역을 출발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생존을 건 치열한 사투를 그린 재난 블록버스터 프로젝트 [부산행].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대한민국에는 긴급재난경보령이 선포된다.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단 하나의 안전한 도시인 부산까지 살아가기 위해 분투한다. 과연 이들은 각자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낼 수 있을까?
한국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터 영화인 [부산행]에서 정유미는 움직임이 불편하고, 진통으로 인해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임산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긴급 상황 속에서 침착하고 빠르게 대응하며 사람들을 돕는다는 점이 의외성을 준다. 정유미는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고,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은 어떤 인물이든 전형성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정유미를 향해 ‘전무후무한 신선함’을 가진 배우라고 평했다. 공개부터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부산행]은 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정유미는 흥행까지 성공한 배우로 거듭난다.
[82년생 김지영] (2019) / 김지영 역

1982년 태어나 2019년 오늘을 살아가는 ‘김지영’의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그린 [82년생 김지영]. ‘지영’(정유미)은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료이자 엄마로 살아간다. 때론 어딘가 갇힌 듯 답답하기도 하지만 남편 ‘대현’(공유)과 사랑스러운 딸, 그리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항상 든든한 가족들이 ‘지영’에겐 큰 힘이다. 하지만 지영은 반복적인 일상 안에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한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언젠가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82년생 김지영]에서 정유미는 씩씩하지만 때론 상처받기도 하고, 밝게 웃지만 그 안에 아픔도 있는 평범한 인물 ‘지영’을 연기했다. 또한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 속에서 성장해 아픔을 가진 인물로, 속앓이를 겪으면서도 가족들로 인해 변화하고 서로를 보듬어가는 과정이 여운을 남긴다.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담담한 모습부터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뜨거워지는 감정까지, 정유미의 섬세한 감정 연기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이 작품으로 정유미는 대종상, 부일영화상 등 다수의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