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 미드를 좋아하지 않았던 30대에게 생긴 일

 

By. 그레이스 ([email protected])

 

<이미지: ABC>

 

::: 미드를 좋아하지 않는 30대
나는 본래 소위 미드나 영드, 일드를 즐겨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드 세계로 입문하는 계기가 된 CSI, NCSI, 워킹데드 같은 잔혹 스릴러, 수사물은 내 취향이 절대 될 수 없었다. 잔혹하게 피를 본 뒤 그 사건이 일어난 현실세계를 파헤치는 내용은 어쩐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유일하게 관심이 가는 것이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본인이 잔병 전문가라 병원이라는 공간과 미국의 젊은 의사들 스토리라는 것에 친밀함에서 오는 호기심 같은 것이 있었다. (…) 잔혹 스릴러나 수사물이 아니었고, 한 편으로 끝나버리는 드라마가 아니어서 힘이 빠지지 않은 점도 컸다. 외려 남들이 ‘드라마물이라 별로’라고 했던 포인트는 호기심을 더욱 키워주었다. 그리고 이 호기심을 실험해 보기에 가장 좋은 스트리밍서비스 ‘왓챠’를 통해 게으르니스트의 미드 탐험기가 시작되었다. 왓챠플레이 감사합니다. 마지막 시즌까지 잘 좀 물어다 주세요. ( __)

 

https://www.youtube.com/watch?v=dwqTYzNgufY&feature=youtu.be

<그레이 아나토미> 앞 시즌들의 시작 부분에는 특유의 시그널 송과 함께 이 영상이 꼭 나왔다. 섹시하고 긴장되고 소름 돋는, 드라마를 압축한 짤방.

 

::: 의학드라마, 어디까지 봤니
사실 의학드라마에 열광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되짚어보면 남들 보는 건 또 다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와 닿는 의학드라마는 손에 꼽는다. 특히 한드에서는 더욱 그렇다. 주의 깊게 케이스를 다루지도 못할뿐더러, 조금 진중한 느낌이 날 만 하면 애정 코드로 빠져버린다. 그리고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16부작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후다닥 종결해 버린다. 시즌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보니, 스토리와 캐릭터가 다양한 경우가 많을 의학드라마의 특징적 문제를 그대로 단점으로 붙들고 가라앉고 만다.

내가 시즌 1을 시작할 즈음 미국에서 2016년 내 시즌 13이 방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13이라는 숫자와 시즌 1 방영 년도를 비교하니 기대감은 약간 낮아지게 되었다. 2005년에 만든 드라마가 얼마나 대단할쏘냐. 미국 2030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걸로 만족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드라마의 범상치 않은 첫 에피소드. 주연 메러디스 그레이가 인턴으로 첫 출근하는 날, 전날밤 바에서 만나 뒹굴었던 남자는 메러디스의 담당 교수인 것.. 그렇게 나는 막장드라마의 대문을 열어제꼈다.

 

<이미지: ABC>

드라마 초창기 인턴들과 데릭 셰퍼드. 이 조합 참 좋았는데.

 

이 드라마는 평소 내가 한드에서 느끼지 못 했던 점들을 속시원히 들여다보게 해 주고, 대신 한드처럼 현실세계에 없는 일들에 대해 무한긍정 마인드를 심어주거나 환상을 (은연중에) 부여하지 않았다. 물론 외과의사라는 직업적 특성도 있었겠으나, 주연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의욕적으로 팔딱거렸다. 이전에 다른 눈에 띄는 배역을 한 적이 없던 배우들임에도, 의사의 삶에 완전히 녹아있는, 베테랑 의사 연기자들 같았다. 덕분에 드라마는 지루함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매우 다르고, 실수를 극복하고 완성형이 되어가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험하게 마련이다.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투철한 완전무결성을 지향하는 의사의 세계에서, 그런 이유로 꾸준히 놀림이 되었던 ‘조지’의 이야기다. 조지는 인턴 초, ‘살인면허 007’로 불리고는 했다. 그 스스로도 무척 괴로웠을 거다. 결국엔 셀프위로만이 그 자신에 인공호흡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만의 셀프 특훈(?)으로 살아남아 레지던트의 문턱에 서게 된다. (작가의 장난인지) 그는 문턱을 한 번에 넘지 못한다. 두 번째 시도에서 겨우 넘어섰을 때, 사실 또 색다른 전개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 Shonda Rhimes는 더 큰 색다른 전개를 주었다. 밤을 새워 일하던 조지가 잠깐 집에 가고 없을 때, 달리는 버스가 어느 여자를 치게 되었을 때, 여자를 밀치고 대신 버스에 치인 사람의 사고로 응급실이 아수라장이 된다. 너무 심하게 얼굴이 손상되고 신원조차 알 수 없는 남자, 수술을 해야 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웠던 상황.. 그 상황에서 환자는 사력을 다해 여주인공의 손에 숫자 세 개를 쓴다. “007”

이 작가, 정말 대단하구나, 그때까지는 반신반의했던 작가에 대한 후기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 드라마의 ‘둘째가라면 서러울’ 팬이 되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고, 싸우고 공부하고, 일하고 뒹굴고,

평범한테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일상.

서로 구박하고 놀려도 애틋한 우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

 

많은 커리어 경험을 쌓기 위해 늘 ‘수술!! 수술!!’ 외치는, 수술이 ‘고픈’ 특이한 외과 인턴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주된 이야기 공간을 거의 모두 병원 안에서 해결한 점이 시작부터 한드와 달랐다. 그야말로 피 튀기는 새벽 응급실과 겨우 취침을 취하거나 불꽃이 튀는(!) 도미토리 침실, 남녀 성역 없는 라커룸, 속 이야기의 주된 무대가 되곤 하는 계단과 엘리베이터, 짧은 점심시간만의 묘미를 더하는 카페테리아. 1분 1초가 각박하게 흘러가는 병원의 시계만큼 피곤함이 얹혀가는 그들의 리얼한 컨디션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말로만 피곤하고 얼굴이며 옷매무새, 머리모양까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한드의 의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에는 누구보다 똑똑했고 촉망받는 의대생이었으나, 삶과 죽음을 다루는 병원에서 매 순간 자신의 한계를 실험하느라 지친 ‘진짜’ 인턴들이 들어있었다. 의사들의 삶이 이렇구나,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란 이렇구나_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또 나를 돌아보게 했던 초반의 에피소드들. 

 

<이미지: ABC>

가장 많이 싸우고 결국에는 가장 많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

“You’re MY PRESON.” 계속 생각나는 대사다. 

 

☞ 12 Ways Grey’s Anatomy Ruined Your Life
– 그레이 아나토미가 당신의 삶을 망친 열두 가지 (…) 그레이의 핵심! 간 쫄리는 사건들이 집약되어 있다. ㅠ

 

::: 다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녹록지 않은 진짜의 삶에서 쏟아지는 ‘질문’은 늘 다음 편을 계속 보게 만들었다. 우리네 삶 속에서 두 개 이상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그 짧은 틈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고통스러운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물며 병원이고, 응급실이고, 수술실이니.. 갈등의 연속을 경험하다 보면 오는 결정 장애, 무엇을 결정했던 후련하지 않을 마음과 결과에서 오는 극명한 희비.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주기도 하고, 개인의 삶마저 무너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다시 트라우마의 희생양이 되려 나서는 모습에서 약간의 감동마저 더해졌다.

 

<이미지: ABC>

시즌 8 마지막 아연실색할 에피소드.. 비행기 사고로 동료들을 잃고 모두 죽을 뻔했던 사건.

 

“사람을 살리기 좋은 날이군요.” 극중 데릭 셰퍼드(신경외과의)가 수술을 시작할 때 하는, 고유 멘트다. 사람을 살리는데 날씨가 좋다니. 마치 ‘아, 오늘 날씨가 좋군요’와 같은 일상적인 멘트면서 동시에 굉장한 비장미가 느껴진다. 이 드라마는 딱 이런 멘트와 같은 극적인 전개가 자주 쏟아진다. 특히나 의사들의 주된 직업이 사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사실을 마구잡이로 일깨워준다. 의사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씌우는 것이다. (작가 참 독하다..) 신경외과 전문의 데릭 셰퍼드와 심장외과 전문 레지던트(시절의) 크리스티나 양은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의도하지 않게 환자의 생명을 잃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을 살리기 좋은 날’을 운운하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 열정이 지나쳤던 것일까. 특히나 더 마음 쓰였던 환자여서, 충격은 더했고, 길고 지루한 의료소송과 더불어 그는 메스를 내려놓고 몇 개월을 잠수해버리기에 이른다.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퇴짜를 놓고, 약혼반지마저 야구방망이로 쳐서 던져버릴 정도로 그는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실망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약혼자마저 등지고 있던 그는 그만의 드림하우스를 짓기 위해 땅을 다지고, 벽돌을 쌓아올리며 그는 점점 자신을 되찾았다. 하나하나 쌓아갈 용기를 다시 얻고, 수술실로 복귀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삶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수는 있지만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 과정을 극복하는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구나. 의사란 직업은 참 생각보다 어깨가 무겁고 스트레스가 큰 직업이었구나, 문득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나를 진료해주시는(셨던)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달까.

참으로 극적인 드라마. 배우자를 잃기도 하고, 총기 사고로 동료를 잃기도 하고, 비행기 사고로 끔찍이 아끼던 동료와 동생을 잃기도 한다. 그 와중에 그들은 우정과 사랑과 인생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성숙한 사람들로 나아가고 나아간다. 치기 어린 인턴의 끼는 빠졌지만 인생의 깊이는 더해졌다. 그렇지만 역시 ‘쉽게 오는 삶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몰랐던 삶의 영역에 대한 발견과 그들의 삶도 계속된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은근히 풍겨오는 인간미. 삶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또 묻고, 삶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도록 힘을 주는 드라마. 그것이 다음 시즌을 더 궁금하게 하는 그레이만의 매력이 아닐까. 아, 시애틀 가고 싶다. 😉

 

<이미지: A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