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순간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생존 투쟁

숫자로 본 <덩케르크>와 <군함도>

 

by. 빈상자

 

오는 7월 개봉 예정인 <덩케르크>와 <군함도>는 올여름 최고 흥행 기대작이다. <덩케르크>는 <인터스텔라>로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찍은 몇 안 되는 할리우드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이고, <군함도>는 <베테랑>으로 천삼백만 관객을 모은 류승완 감독의 차기작이다. 두 작품의 기대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 CJ엔터테인먼트>

 

이러한 기대감을 제외하면 <덩케르크>와 <군함도>는 색깔과 이야기가 전혀 다른 영화일 것만 같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류승완 감독은 전혀 다른 스타일과 역량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른 감독이다. 그런데 두 영화의 배경을 들여다볼수록 의외로 비슷한 지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참혹한 순간에 몰린 인류는 생존을 위해 어떻게 그 시대를 버텨냈으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바라보고 있을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두 작품의 묘한 공통분모를 숫자를 통해 비교해 보았다.

 

 

1. 1940년과 1945년

<덩케르크>와 <군함도>는 현재까지 인류사의 마지막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제2차 세계대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덩케르크>는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독일 나치에게 포위된 40만 명의 연합군(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의 운명을, <군함도>는 1945년 유럽 전선의 반대편인 일본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의 가혹한 운명을 보여줄 참이다.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덩케르크 전투’는 영광의 순간이 아니라 전멸의 위기를 앞둔 치욕의 순간이었다. 동쪽으로 폴란드 침공을 마친 나치가 이제 방향을 바꿔 베네룩스 3국을 통해 서부로 진격해오자,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나치를 저지하기 위한 대군을 결성했다. 하지만 호기롭던 연합군의 40만 대군은 프랑스 북부의 작은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 포위되고 말았다. 아직 전쟁 초기였지만 영국이 조건부 항복을 고려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바로 앞 도버 해협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영국군들은 물론, 고국을 등지고 후퇴해야 하는 프랑스군조차 전차도 야포도 다 버린 채 목숨만이라도 건져야 했다. 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닌 생존이 우선인 전투였다.

 

 

<이미지: CJ엔터테인먼트>

 

일제가 조선인을 속이거나 강제로 끌고 간 군함도의 참혹한 환경은 일제강점기를 버텨내야 했던 우리 민족의 고통이 함축되어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민족이 겪었던 치욕과 한의 감정을 다루는데, <군함도>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참담하고 혹독했던 순간으로 파고들었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945년은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최후의 항전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자국민도 가미가제로 동원해 자살을 강요했던 만큼, 다른 민족에겐 더욱더 가혹한 희생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아도 참혹했던 군함도의 조선인의 삶은 최악의 최악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2. 9일 그리고 3년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연합군은 덩케르크에 군대가 고립되자 고립된 40만 대군을 구할 대탈출 계획인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을 수행하게 된다. 구조만 9일 동안 지속된 탈출 작전에 연합군은 갖고 있던 모든 군과 민의 자원을 총동원했다. 동원된 천여 척의 선박 중 70%가 어선, 요트, 바지선 등의 민간 선박이었으며, 그중 1/4의 선박을 잃는 등 구조자들 역시 목숨을 건 9일간의 구조가 진행되었다.

 

 

<이미지: CJ엔터테인먼트>

 

반면, 군함도에 갇힌 조선인을 구해줄 조국은 없었다. 군함도 조선인의 상당수가 끌려간 시기는 1939년에 ‘국민 징용령’이 제정되고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1년 12월 이후 몇 년 간 집중되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1925년부터 끌려간 조선인도 있었다고 한다. 내부에서의 탈출도 외부의 도움도 없는 섬에서 조선인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을 버텨야 했다. 하다못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은 쉽지 않았다. 패망한 일제가 조선인의 귀국을 돕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의 조국도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결국 대부분은 전쟁 이후에도 군함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지옥섬’에 머물다가 스스로 배편을 마련해서 힘겹게 육지로 돌아와야 했다.

 

 

3. 6만8천 그리고 134명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나치에게 허점을 찔려 밀리던 연합군은 도버 해협을 건너기 위해 프랑스 북부로 후퇴하다 덩케르크에 고립됐다. 25만 명의 영국군과 15만 명의 기타 연합군이 전멸할 위기에 몰린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지금도 논쟁이 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치의 진군을 3일 동안이나 멈추게 했다. 3일은 연합군이 탈출 작전을 계획하고 수송할 배를 준비할 수 있었던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3일 후에 진격을 재개한 나치는 주로 공군을 동원해 연합군의 탈출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 날이 많았다. 결국 탈출 과정에서 6만 8천 여 명의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33만 8천여 명은 무사히 도버 해협을 건너 탈출할 수 있었다. 처음 절망적이던 상황에 비해 85% 생존율은 대성공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이나모 작전’이 끝난 직후 처칠은 ‘기적적인 구조(Miracle of Deliverance)’라고 환호했다.

 

 

<이미지: CJ엔터테인먼트>

 

그러나 군함도에 갇힌 조선인은 운조차 바랄 수 없었다. 그들은 바다 아래로 최장 1000m인 좁은 갱도 안에서 45도가 넘는 고온과 유독가스에 노출된 상태로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하다못해 식량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거나 그마저 거르는 경우가 허다해 배고픔과도 싸워야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나가사키 항구에서도 18km 떨어진 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것은 아무리 날씨가 좋은 날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어렵게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도 파도에 목숨을 잃거나, 다시 일제에 잡혀 살점이 떨어지도록 채찍을 맞으며 고문을 당했다. 군함도에서 최대 800명까지 있었던 조선인 노동자 중 목숨을 잃은 사람이 134명이다. 생존율이 83%로 덩케르크의 병사들보다 낮다. 그것도 전투에 나선 병사들이 아닌 탄광에 있던 노동자의 현실이 그랬다. 134명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숫자일 뿐, 기록을 말살한 일제가 감추고 있는 희생자들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도전, 역사 속으로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 CJ엔터테인먼트>

 

슈퍼히어로로 자신의 입지를 넓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시공간을 넘나들고 의식의 겹구조를 자유롭게 탐구해왔다. 한편 불합리한 사회의 치부를 극으로 몰아붙이기를 즐겼던 ‘류승완’ 감독은 특히 액션과 코미디에서 장점을 발휘해왔다. 두 감독 모두에게 경계를 넘어 상상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두 감독이 상상력이 제한되고 시대에 대한 무게감마저 져야 하는 역사를,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했던 역사를 어떻게 다듬어 보여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