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영화가 흥행하는 것보다 좋은 영화가 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영화계의 슬픈 진실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고전 명작’ 혹은 ‘최고의 작품’이라 불리는 영화들이 정작 극장에선 좋은 성적표를 받지 못한 경우도 상당하다. [파이트 클럽], [블레이드 러너], [샤이닝] 등 예를 들려면 끝도 없다. 유명세는 덜해도 많은 이들에게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 중 안타깝게도 극장에서 빛을 발하지 못한 작품을 살펴본다.

1. 트론 (1982)

이미지: Buena Vista Distribution Company

로튼토마토: 평단 74% / 관객 69%
메타스코어: 58
북미최종: $33,000,000
전세계최종: $33,000,000
제작비: $17,000,000

영화의 시각/특수효과 부문에 끼친 영향력만으로도 1982년작 [트론]을 ‘고전 명작’이라 불리기 충분하다. 믿기 힘들겠지만,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이는 장면들 중 상당수가 실사에 애니메이션 효과를 넣은 것이라고. 당시 컴퓨터의 부족한 기술력을 노력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극복한 셈이다. 시각효과 분야에 혁신적인 발자취를 남겼지만, 정작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수작업이 주로 이루어지는 할리우드에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은 반칙’이라며 실격시켰기 때문이다. 제작진 입장에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한데, 실은 아카데미 이전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본래 1982년 크리스마스에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퇴사한 후 경쟁 제작사를 차린 돈 블루스의 [마우스 킹]을 견제하기 위해 무리해서 일정을 앞당긴 것이다. 졸지에 [E.T.]와 [폴터가이스트] 등 1982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작품들과 맞붙게 되면 들인 시간과 제작비를 고려하면 아쉽게 느껴지는 3,300만 달러로 흥행을 마무리했다.

2. 스타쉽 트루퍼스 (1997)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주)

로튼토마토: 평단 64% / 관객 70%
메타스코어: 51
북미최종: $54,814,377
전세계최종: $121,214,377
제작비: $105,000,000

국내에선 ‘스타크래프트 실사판’으로도 잘 알려진 [스타쉽 트루퍼스]는 폴 버호벤 감독이 야심 차게 내놓은 SF 액션 영화다. [쇼 걸]의 흥행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유명 원작이 있는 작품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지만, 결과는 안타깝게도 ‘실패’였다. [쇼 걸]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자랑거리인 과도한 폭력성과 선정성, 풍자가 도리어 독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길 바랐던 팬들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해 제작비 1억 달러를 가까스로 넘는 1억 2,12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그나마 2차 시장으로 넘어간 후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적자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이은 흥행 실패로 [원초적 본능], [토탈 리콜]로 이름을 날리던 폴 버호벤은 할리우드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여담이지만 스타크래프트 시리즈도 [스타쉽 트루퍼스]의 원작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3. 칠드런 오브 맨 (2006)

이미지: 영화사마농(주)/씨네클럽봉봉미엘

로튼토마토: 평단 92% / 관객 85%
메타스코어: 84
북미최종: $35,552,383
전세계최종: $70,595,464
제작비: $76,000,000

‘최고의 SF 영화’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도 극장 상영 당시 성적은 좋지 못했다. 7,600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자된 영화의 북미 성적은 3,550만 달러, 해외 수익까지 합쳐도 제작비를 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일각에선 개봉 시기가 흥행 실패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칠드런 오브 맨]은 200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 개봉했다. 그것도 제한 상영으로 말이다. 물론 ‘처녀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인류를 구원한다’는 영화 전개가 성경에서 왔다는 해석이 정설이기는 하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과 암울한 분위기를 갖춘 작품을 크리스마스에 적은 수의 상영관에서만 공개한다는 건 흥행을 사실상 포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대중을 사로잡는 여느 명작과 마찬가지로, [칠드런 오브 맨] 또한 2차 시장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며 손해를 메꿀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액션 영화가 아님에도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 자동차 추격전은 지금도 최고의 액션 시퀀스 중 하나로 꼽힌다.

4. 괴물 (1982)

이미지: Universal Pictures

로튼토마토: 평단 84% / 관객 92%
메타스코어: 57
북미최종: $19,629,760
전세계최종: $19,629,760
제작비: $15,000,000

1982년작 [괴물]은 단순히 ‘존 카펜터의 최고 연출작’을 넘어 ‘역대 최고의 공포 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불신에서 싹트는 공포와 의심을 다루는 카펜터의 관점과 많은 관객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충격적인 특수효과는 지금 봐도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나 [괴물]의 흥행 성적은 제작비를 살짝 웃도는 수준인 1,960만 달러, 공포 영화의 고전 명작이라 하기엔 다소 초라하다. 당시 평론가들이 인간에 대한 존 카펜터 특유의 염세적인 시선과 과한 폭력성에 비판을 쏟아냈고, 개봉 몇 주 앞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공개되면서 흥행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쳤다. 대목이라 불리는 여름 박스오피스에 똑같은 외계인을 주제로 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영화’와 ‘선혈 낭자한 공포 영화’가 맞붙는다면? 승자는 불 보듯 뻔하다. 물론 시간이 흘러 [괴물]에 혹평을 남긴 평론가들이 영화를 재평가하고 이후 몇 차례 리메이크되는 등, ‘고전 명작’의 대우를 받고 있다.

5. 보물성 (2002)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주)

로튼토마토: 평단 69% / 관객 72%
메타스코어: 60
북미최종: $38,176,783
전세계최종: $110,041,363
제작비: $140,000,000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보물성]은 ‘2D 애니메이션의 정점’이라 불리는 동시에, ‘디즈니의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스페이스 오페라로 재해석한 영화는 무한의 우주 바다에서 펼쳐지는 보물 탐험을 그린다. 카툰 렌더링과 딥 캔버스 기법을 적극 활용한 화려한 영상미 덕에 두터운 팬덤을 갖춘 작품이지만, 사실 당시 흥행 성적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다양한 최신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느라 제작비가 1억 4,000만 달러까지 불어난 데다,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007 어나더데이]와 맞붙은 개봉 일정이 맞물린 결과다. 결국 영화는 북미 3,800만 달러와 전 세계 1억 1,000만 달러라는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았고, 지금까지 ‘가장 큰 적자를 본 애니메이션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야심 차게 계획했던 속편 제작이 무산된 건 덤이다.

6. 이벤트 호라이즌 (1997)

이미지: 유아이피-씨아이씨영화및비디오배급(유)

로튼토마토: 평단 27% / 관객 61%
메타스코어: 35
북미최종: $26,673,242
전세계최종: $26,673,242
제작비: $60,000,000

폴 W.S. 앤더슨의 [이벤트 호라이즌]은 공포 영화 마니아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다. 7년 전 실종된 우주 탐사선에서 생존 신호를 발견하고 구조를 떠난 이들이 겪는 끔찍한 사건을 담은 영화가 개봉 당시 벌어들인 금액은 2,660만 달러, 제작비 6,000만 달러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평단의 반응이 극과 극(대부분은 불호)으로 나뉜 것도 관객들을 주저하게 만든 요인이었지만, 무엇보다 파라마운트에서 잘못 홍보한 게 결정적인 패착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그저 ‘SF 스릴러’ 정도로 홍보하다니, 멋모르고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훤하다. 여전히 [이벤트 호라이즌]을 혹평하는 이들도 많지만, 개봉한 지 23년이 지나도록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 작품에 영향을 받은 SF 호러물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전형적인 클리셰 범벅’이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7. 아이언 자이언트 (1999)

이미지: (주)삼백상회

로튼토마토: 평단 96% / 관객 90%
메타스코어: 85
북미최종: $23,159,305
전세계최종: $23,180,087
제작비: $70,000,000

[아이언 자이언트]도 흥행 참패에 가려진 또 한 편의 명작 애니메이션으로 꼽힌다. 지구에 불시착한 거대 로봇과 외톨이 소년의 우정을 다룬 영화로 [라따뚜이]와 [인크레더블]을 탄생시킨 브래드 버드의 연출 데뷔작이다. 차기작의 명성을 감안하면 데뷔작의 수준도 얼추 가늠해볼 수 있는데, 실제 당시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극찬을 받았다. 문제는 호평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것. 제작비 7,000만 달러가 투입된 영화의 흥행 성적은 고작 2,315만 달러, 정말 제대로. 혹평도 아닌 호평이 영화에 악영향을 끼친 이유는 무엇일까? 후에 밝혀졌지만, 테스트 시사 이후 자신감이 생긴 브래드 버드가 홍보 전략을 짜기 위해 상영 일정을 미루려 했던 워너브러더스에 실망해 “차라리 빨리 공개하자”라며 요구했고, 제작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홍보 플랜도 없는 상황에서 승낙했다고. 지나친 자신감이 흥행 대참사를 부른 셈이다. 참고로 [아이언 자이언트]의 실패가 워너브러더스 피처 애니메이션의 대규모 인원감축의 시발점이 됐다는 슬픈 후일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