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이미지: 소니픽처스코리아

사랑이 부재(不在)한 시기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싶지만, 여기서 가리키는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의미와는 거리가 좀 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사랑의 기운이 넘쳐난다. 노랫말에 ‘사랑’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처럼, 거리를 가득 채운 연인 간의 사랑의 눈빛과 가족 간에 오가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반려동물을 대하는 따스한 손길 하나까지도 말이다. 그런데도 이 사회에 ‘사랑’이 부재하다는 건 무슨 얘기일까. 사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부재’는 이 사회가 사랑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과도 같다. 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분야를 통해 사랑을 정의하고 표현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이를 부정하고 포용하려 애쓰는 모양을 거부하는 듯하다. 오히려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을 애써 부정하고 이를 경계하려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뉴스를 가득 채운 여러 기사와 온라인을 풍성하게 달구고 있는 여러 담론만 봐도 그렇다. 사랑보다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메워 넣은 삶에 대한 고민보다도, 오히려 정치적 비판과 계층 간 단절, 또 삶을 대하는 비극적인 결말 등이 수면 위로 쉽게 떠 오르니까 말이다. 이 모든 게 소통하지 않은 채 이를 부정하려 애쓰는 듯한 모습의 단면만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은 삶을 채워주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말하자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갈수록 사랑이란 단어를 조금씩 지워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게 어떤 미래를 가져올 지 그 결과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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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2019)은 이 ‘사랑’의 가치를 현대적 시선에서 보다 구체화한 작품이다. 워낙 탄탄한 원작의 구성을 기초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물 간 개성과 이를 통한 다양한 삶의 틀을 제시함으로써 감독 특유의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을 제대로 덧대어 본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주인공 조(시얼샤 로넌 분)의 시선을 빌려, 등장인물 개개인의 삶을 마치 수채화의 한 폭 마냥 다채롭게 표현한 점이 그렇다. 영화는 당시 사회적 약자로 인식된 여성의 삶과 내면이 여러 환경에 부닥치며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대중의 시선에서 바라본 성장 과정이 앞에서 언급한 사랑을 제대로 정의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현대 사회 속 ‘사랑’의 부재를 주장한 건 바로 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에 흘러나온 에이미(플로렌스 퓨 분)의 대상, “꿈을 왜 창피해해야 해?”는 여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대목이다. 극 중, 조는 소설을 쓰는 예비작가로 등장한다. 그의 글에 대한 자부심은 마치 타인의 시선에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굳세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관점과 해석이 남들의 눈에 어서 띄어 인정받기를 바라는 두려운 마음도 존재한다. 결국 자신이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이겨내야 할 장벽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도, 이와 동시에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의 글은 어느새 자신만의 개성을 갖춰 나가고, 자신의 청춘을 담아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언니 멕(엠마 왓슨 분)이 자신의 꿈을 접고 새로운 꿈을 선택한 것도, 동생 에이미가 당찬 모습으로 꿈과 사랑을 쟁취한 것도, 어쩌면 베스(엘리자 스캔런 분)의 죽음까지도, 모두가 삶을 완성하고 해석하는 과정이고, 또 사랑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해당하기도 한다. 오랜 고생 끝에 조가 완성한 작품이 단순히 하나의 글만으로 평가되지 않고, 그가 성장하며 겪은 희로애락의 무게를 잘 버무린 그의 삶 그 자체가 된 이유다. 그 안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꿈에 대한 의지와 성취감에 들뜬 기쁜 순간이 존재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고 화가 나거나 혹은 절실하게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며, 또 즐겁고 행복한 순간에 취한 추억을 내재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그들의 성장을 구체화하고 있는 거라면, 이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단연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이의 존재는 분명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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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 아씨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삶의 주체는 그들 모두가 행동한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는 서로를 믿고 순간을 함께 나눈 ‘사랑’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만남과 이별의 순간에도 성공과 실패의 순간에도, 그 소통의 순간에 언제나 모두가 함께 했고, 모두가 함께 했기에 이를 견뎌 나갈 수 있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원작의 풍미를 제대로 살리면서도 이 영화를 통해 현대 사회 속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본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덧대어 보는 게 성공한 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 신문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병(火病)이 극에 달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상식이 안 통하는 사회, 아마도 그 화병 또한 이것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는지. 글의 서두에서 얘기한 ‘사랑의 부재’와 맞닿는 부분이 아닐까. 이건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개개인의 내면에서 형성되고 사라지는 존재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불길이 꺼졌다면 언제든지 다시 켤 수도 있다는 얘기이겠다. 영화 속에서 조는 그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사랑과 우정, 반성과 이해의 과정을 담아 자신만의 문장을 깎고 다듬어 간다. 마치 그를 둘러싼 이야기에 자신의 감성적 부분의 성장 과정을 덧칠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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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다. 누군가가 만든 이 이야기는 여러 번 덧칠할수록 비어 있는 틈이 메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연스레 이어갈 수 있다. 때로는 영화 [작은 아씨들] 속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질책하게 된다. 나만의 이야기를 글로써 펼친다는 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누군가의 스타일에 이야기를 얹어 오롯이 비슷한 여정을 걸어가는 게 아니라, 나만의 삶을 걸어갈 때 비로소 내 이야기에 ‘사랑’의 생명이 불어넣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거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그건 나만의 이야기이고, 누구에게나 자신을 수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세상은 풍성한 텍스트를 원하고, 이는 오직 ‘사랑’으로 채워 나갈 수 있다. 모두가 그럴 거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은 현재 왓챠, 웨이브, 티빙, 시리즈온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