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심혜연

‘A Bittersweet Life’라는 [달콤한 인생]의 영제가 인상깊어 곱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울리지 않는 양면을 동시에 가졌다는 점이 어쩐지 인간적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달콤하며 씁쓸한 맛은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을 그린 영화들이 ‘이것도 사랑 아닐까?’ 라며 낭만적인 물음을 던질 때, 완벽히 설계된 사랑 앞에 망설이게 된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라, ‘단순명료’가 아닌 ‘복잡미묘’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콤하고 씁쓸하며, 벅차서 불안하고, 행복해서 마음이 아린 기억들이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사랑에 뛰어드는 순간, 그 모든 감각이 살아난다. 온 감각이 너무나 강렬해서 역설적이게도 혼미하고 몽롱하다. 너무도 살아 있다는 느낌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실재와 이미지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나 자신과도 서먹한 나에게서, 어떤 사랑은 나를 실체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감각을 선물하는 일이 아닐까. 누가 더 알록달록한 감각을 선물할까를 씨름하는 일이 아닐까. 여기 사랑을 이야기하는 두 편의 작품을 만나보자.

[펀치 드렁크 러브] 사랑의 힘은 나를 변하게 한다

이미지: 컬럼비아 픽처스

알록달록한 감각은 어떻게 피어날까. 아름답고 다채로운 색을 칠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화가가 필요하겠지만, 아무렇게나 버려진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 과연 최고의 연주자가 필요할까. 그것의 본질을 되찾아주는 일은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다. 다만 그 낡은 악기를 발견하고도 지나치지 않아야 하고, 낑낑거리며 나의 공간으로 들여와야 하고, 마침내 알맞은 속도와 강도로 그것을 연주해야 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속 주인공 배리는 신비로운 여인 레나를 만난 후, 낡은 풍금 소리에 맞추어 사랑을 연주해간다. 세상은 그를 보채고 질책하지만 레나는 그의 연주를 기다려주고 인내한다. 이 따뜻하고 경쾌한 사랑은 붉은 드레스와 푸른 정장으로 상징된다. 정열적이고 대담한 여인과 미숙하고 고집스러운 남자의 충돌 혹은 화합이다.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진 이들은 사고를 당한 듯한 얼얼함 속에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해간다.

이미지: 컬럼비아 픽처스

이들의 사랑이 극적으로 로맨틱한 이유는 배리가 결코 매력적인 주인공이 아니며, 버려진 풍금에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답답하며 대인기피증과 분노조절장애까지 갖춘 최악의 남자이자 사랑 앞에 솔직하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다. 아무 이유 없이 가끔 울고, 푸딩으로 세계일주를 계획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르는 여자와 폰채팅까지 하다 개인정보를 털려버리기도 한다. 차가운 컨테이너 건물 속에서 평생 수화기나 붙들고 살 것 같던 남자였는데, 레나가 선물한 사랑의 힘은 그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것은 절대 육체적인 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들에게 큰 소리까지 치게 만든다. 그저 사랑에 빠졌을 뿐인데 초인적인 힘을 가진 히어로를 닮아간다. 스스로 ‘내가 가진 사랑의 힘’을 언급할 때, 그의 연약함과 어리숙함은 사랑스러움이 된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 사랑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보통의 연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당신 얼굴을 한 대 치고 싶다’, ‘당신 얼굴을 씹어먹고 싶다’라는 엽기적인 표현들은 그들만의 사랑의 언어가 된다. 다소 괴상하지만, 무채색의 건조함보다는 풋풋한 생기가 더 매력적인 법이다. 술이 주는 알딸딸함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는 어딘가 독특하고 이상한 이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 또한 이 영화처럼 친절하지 않은 모양으로 전개되지 않던가.

[무드 인디고]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질문의 아련하고 씁쓸한 답변

이미지: 스튜디오 카날

그렇게 전개되던 사랑은 언젠가 소멸되기 마련이다. 동화적인 사랑을 그린 [무드 인디고]의 원제조차 [세월의 거품]이다. 치명적인 사랑이 주고 간 얼얼함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사람과 사랑의 생명력은 거품처럼 유약하다. [무드 인디고]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잃어가는 연인들의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여인 클로에의 폐에 수련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콜랭이 그를 살리기 위해 험난한 노동에 뛰어들며, 채도 잃은 사랑의 유한성을 경험한다. 다채롭고 화려한 빛과 색이 어두컴컴한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광경이 너무도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사랑이 선사하는 색채적 감각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결국 직관적으로 슬퍼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폐에서 수련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으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도망치고 싶고 놓아버리고 싶은 상황이지만, 콜랭은 색이 바랜 사랑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손수 만든 구름과 칵테일 피아노를 선물하던 로맨틱한 발명가는 돈을 버는 처연한 기계가 되면서까지 그를 위해 희생한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 거품을 잡으려는 미련함이 이들의 사랑을 더욱 수렁으로 빠뜨린다.

이미지: 스튜디오 카날

동시에 영화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생각보다 감정, 머리보다 가슴에 있다고 배웠다. 이성의 마비보다 정서적 결핍이 더 거대한 공허함을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인간 본질의 무게가 버겁다고 해서 다음 생은 의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영화는 콜랭의 고통과 좌절, 절망을 그려냈지만 후회는 결코 그리지 않는다. 선택하고 길들이고 사랑하는 사이에 본질이 실존을 앞섰고, 무지개가 먹구름이 된다 해도 그 또한 사랑의 형태임을 알게 된다.

사랑 영화를 고를 때 고려하는 점이 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위 두 작품은 특히나 이해할 수 없었고, 특히나 사랑할 수 있었다. 이들의 불친절함과 전개 없음, 유별남과 산만함이 꼭 진짜 사랑 같기 때문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과 미셸 공드리가 다시는 이런 사랑 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 같아서 특별하기도 하다. 두 거장이 ‘마음대로’ 만든 두 작품을 통해 불변의 로맨스 공식을 배울 수 있었다. 지적인 철학자든 순수한 예술가든 사랑 앞에서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