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났지만, 여기서 봤던 영화의 여운은 아직도 지속된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서는 재미는 물론 메시지도 묵직한 작품이 많아서 사색의 시간이 더욱 깊어질 듯하다. 그래서 정리해본다. 이번 영화제에서 에디터들이 본 인상적인 작품들을 모아 짧은 리뷰로 담았다.

플랜 75 – 고령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이미지: Loaded Films

청년 세대들의 노인 부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5세의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제도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소재만 들으면 격렬한 사회적 갈등과 논쟁이 예상되지만, 영화는 의외로 차분하다. 담담하다. 아니, 마치 이런 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듯이 등장인물들은 순응하고 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딱히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지만 너무나 현실적이고, 이 말도 안 되는 제도를 따라가는, 아니 패배한 모습을 그리는 영화가 무서웠다.

작품은 크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플랜75에 해당되어 안락사를 준비 중인 독거 노인, 지금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일로서만 대하는 공무원, 그리고 이 때문에 취업의 기회를 얻은 외국인 노동자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아무 연관 없어 보이는 이들이 묘하게 중첩되어 나비효과를 부르는 과정이 꽤 의미 있다. 사회적 자살을 용납하는 제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고, 직업을 얻는다는 시스템의 냉정함이 씁쓸함을 더한다. 극중 상황은 분명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저들과 다른 선택을 할까라는 회의감이 마음을 더욱 짓누른다. 전체적으로 [플랜 75]은 담담하지만 절도 있고, 고령화 시대 속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GV는 단순히 상영 후에만 있지 않다. 영화관 밖으로 나간 뒤 맞닿는 현실 자체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진정한 ‘관객과의 대화’시간이 아닐까? (에디터 홍선)

아줌마 – 낙오? 오히려 좋아! 중년 여성이 부르는 인생 찬가

이미지: Giraffe Pictures

심오한 작품이 쏟아지는 영화제에서 성별과 나이 관계없이 편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발견했다. 싱가포르-한국 합작 영화 [아줌마] 이야기다. [아줌마]는 한국을 방문한 한류 팬 아줌마 림메이화가 모종의 이유로 투어 그룹에서 낙오되어 각종 사건에 휘말리는 코믹 드라마다. 영화는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 오랜 세월을 보낸 주인공이 낯선 타국에서의 소동을 통해 인생을 탐구하는 모습을 담았다. 시트콤 같은 초반부를 지나면 영화는 삶에 대한 메시지와 생각거리를 계속 건넨다.

특히 림메이화의 긍정적인 태도와 겸손한 마음씨가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삶이라는 이름의 경주에서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여기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라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림메이화를 돕는 정수를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 경계심을 세우면서 사는 건 아닌지 반성했다. 영화는 림메이화의 ‘첫 경험’으로 가득한데 그 속에서 빛나는 주인공의 용기는 한국 사회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꿈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가. 림메이화가 투어 그룹에서 낙오된 것이 오히려 다채로운 경험으로 이어진 것처럼 우리 삶도 그렇다. 늦었다고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고 가끔은 우회해도 좋다. 극장을 걸어 나오니 머릿속에 요즘 유행어가 떠오른다. ‘오히려 좋아!’ (에디터 예은)

슬픔의 삼각형 – 화끈하게 뼈 때리는 계급의 뒤틀림

이미지: Fredrik Wenzel@Plattform Produkion

[슬픔의 삼각형]은 모델이자 유명 인플루언서인 칼과 야야 커플이 호화 크루즈 여행을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총 3부작으로 나눠서 다룬 작품이다. 1부는 칼과 야야 커플이 중심이 된 두 관계의 이야기, 2부는 호화 크루즈 여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마지막 3부는 배가 전복됨으로 섬에 표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루즈의 선원들은 손님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억지스러운 부탁을 하든 무조건 “예”를 외쳐야 하는, 삼각형으로 그려진 계급 사회의 맨 밑바닥 계층이다. 현재 계급이 타파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영화에서 느껴지듯 보이지 않는 벽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감독은 이를 아주 유쾌하고 통쾌하게 그려냈지만, 뭔가 모르게 그 모습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영화가 중반으로 흐르면서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되고, 크루즈가 뒤틀리는 과정에서 온갖 이들의 구토와 배설이 난무하는데, 그 장면이 마치 하층민들의 폭동처럼 느껴졌다. 살아남은 몇몇 이들이 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불을 피우고, 생선을 잡는다. 결국 요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청소부가 피라미드의 가장 상위 단계에 올라선다. 또 부유한 손님들은 그저 무능한, 청소부의 지시에 따르는 하층 시민으로 전락할 뿐이다. 절대적일 것만 같은 삼각형이 뒤집혀버린 것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러닝타임 내내 SNS의 이면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계급 갈등의 모습을 꽤 통쾌하고 강력한 풍자로 그려내 작품의 메시지를 더한다. 상당히 잘 만든 영화를 본 만족과는 별개로, 극중 상황이 단순히 픽션으로만 그치지 않음을 알기에 제목처럼 슬프고도 씁쓸한 여운이 꽤 오래 마음을 감싼다. (에디터 그린)

소년들 – 17년 만에 드러난 우리 사회 부조리의 민낯

이미지: CJ ENM

영화 [소년들]은 1999년에 시골의 한 슈퍼마켓에서 벌어진 강도 치사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소년들이 17년 만에 누명을 벗는 과정을 그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기본적인 플롯은 사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과 주변 인물들의 재구성, 1999년과 2016년을 오가는 교차편집을 통해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준다. 사회 부조리가 만연했던 70~80년대가 아닌 2000년 무렵에 벌어진 사실이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던 출연배우의 말처럼,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비리를 고발하고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영화를 확고하게 전한다. 영화 속 ‘소년들’처럼 우리도 살면서 억울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놓였을 때,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사회도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목소리가 또 다른 억압에 묻히지 않게, 우리 역시 더욱 귀를 열고 집중 하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에디터 보광)

코르사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공허함

이미지: Felix Vratny

인생의 행복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코르사주]는 오스트리아 엘리자베스 황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여성인 황후, 마흔에 접어든 엘리자베스는 행복하지 않다.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부족함 없이 살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 살 수 없다. 대중들은 외양만으로 황후를 물고 뜯기 바쁘고, 남편은 그가 행사에 참여해 예쁜 꽃처럼 자리를 지켜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황후는 새로운 기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국민들의 평온을 바란다.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살피고 전쟁에 관해 왕과 설전을 벌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그의 진취적인 가치관을 짐작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그를 담기에 시대와 세상은 한없이 보수적이고 꽉 막혀 있다. 황후는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 마주한 카메라의 조리개 앞에서 자유롭게 웃는 엘리자베스의 수수한 모습은 값비싼 장식이나 보석보다 더 아름답다. 영화의 결말은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 크로이처 감독이 각색한 엔딩은 영화가 전하는 바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며,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진정 우리가 원하는 행복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가? (에디터 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