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액트 III 프로덕션

넷플릭스에 최근에 공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 [스탠 바이 미]는 사실 1986년에 개봉한 고전 명작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작품의 영향력이 계속되며 여전히 위대한 영화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저리],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유명한 롭 라이너 감독이 연출하였고, 금발에 푸른 눈으로 80~90년대 할리우드를 사로잡았던 리버 피닉스가 주연을 맡았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리버 피닉스의 소년기 시절이 담긴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호연을 펼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워낙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기에 그가 지금 세상에 없다는 것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진다.

어쨌든 영화는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스티븐 킹의 단편 모음집 「사계」 중, 가을 편인 「시체」(The Body)를 원작으로 한다. 서늘한 느낌을 주는 제목과 달리 줄거리는 어린 소년들의 용맹한 모험담이다. 실종된 시체를 찾아 영웅이 되고 싶은 네 명의 소년들은 이 여정을 통해, 우정과 용기를 배우는 동시에 전설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기도 한다. 밝고 따뜻한 성장 영화만은 아니기에, 원제는 ‘순진함에서의 탈피’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과연 영화의 어떤 점이 개봉 4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여러 포인트로 살펴보자.

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들

이미지: 액트 III 프로덕션

오레곤주의 작은 마을 캐슬록(스티븐 킹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에 사는 12세 소년들은 제각각의 상처를 안고 있다. 섬세한 성격으로 문학에 소질이 있는 고디(윌 휘튼)는 죽은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고, 타고난 리더십으로 동네 꼬마들을 지휘하는 크리스(리버 피닉스)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억눌려 산다. 여기에 2차대전의 영웅이었던 아버지를 존경하는 열정적인 테디(코리 펠드만)와 착한 꼬마 뚱보 번(제리 오코넬)까지. 숲속 아지트에서 시시한 일상을 보내는 이 소년들에게, 행방불명된 소년의 시체가 저 멀리 숲속에 있다는 소문은 아주 흥미롭다. 호기심과 모험심에 찬 이들은 곧바로 시체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시체만 찾아낸다면 마을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푼 채로.

하지만 차도 없이 맨몸으로 떠나는 여정은 험난하다. 철도를 따라 걷고 있으니 뒤에서 언제 기차가 돌진해올지 모르고, 거머리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하며, 내 옆의 친구들은 이유 없이 싸우고 울기를 반복한다. 게다가 고디는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형의 장례식에서 아빠가 자신에게 “네가 죽었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는 꿈이다. 현실에서도 고디는 형의 그늘에 가려진 아이이다. 어른들은 고디를 만날 때마다 미식축구를 잘하던 형, 유쾌하고 밝은 형의 기억을 떠올린다. 고디는 그저 형을 사랑하는 것뿐인데, 세상은 이 아이에게 죽은 형의 몫까지 살아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크리스도 열두 살 아이일 뿐이다. 그는 학교에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며 대학 진학을 망설인다. 자신이 도둑으로 낙인찍힌 데에는 학교 선생의 탓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다. 이어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크리스가 사는 세상에서 어른들은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다.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아이가 애어른이 된 것은 씁쓸한 일이다.

성장의 얼굴

이미지: 액트 III 프로덕션

처음으로 서로의 아픔을 진지하게 공유한 소년들은 마침내 끝을 마주한다. 여정의 목적이었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영웅이 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소년들은 시체 앞에서 숨을 죽인다. 아픈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닌 죽은 상태로 누워 있는 시체를 통해 세상에 ‘끝’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버거운 현실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허망해서 당혹스럽다. 차를 타고 달렸다면 그저 창밖의 풍경이었을 테지만, 맨발로 숲을 걸어온 소년들에게는 한없이 아픈 경험이 되고야 만다.

영웅이 되고자 당차게 길을 나섰던 소년들은 씁쓸한 발걸음으로 돌아온다. 헤어지는 소년들의 표정은 장난기 없이 모호하다. 이 모호한 표정이 성장의 얼굴인 것 같다. 웃음기와 장난기가 사라진 자리에 조금의 넉넉함과 느긋함이 차오르는 것 말이다.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마음이 소년들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다.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며 좌절하던 크리스는 후에 고디와 함께 대학 진학반에 입학하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세월이 흐르며 뜸하게 만나다가 나중에는 졸업 사진 속의 얼굴로만 남게 되었다.

거대한 경험을 함께한 친구들도 식당의 일꾼처럼 인생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중년이 된 고디는 말한다. 이처럼 멀리서 이따금 안부를 전해 듣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수십 년을 못 만났어도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슬퍼하고, 기뻐해 줄 수 있다. 어릴 적의 끈끈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완전한 이별도, 현재의 우정도 아닌 그것을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르나 보다. 추억은 재산이라고 하던데, 언제나 열어볼 수 있는 보물을 마음 한켠에 가진 것은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