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길복순]부터 [퀸메이커], [닥터 차정숙], [종이달]까지, TV와 드라마는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가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들의 전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치열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퀸’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인간적이었다. 이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겠다. 세상이 ‘여왕’(혹은 그만한 위치의 수장 혹은 리더)이라고 부른 여인들은 누구보다 화려하고 고독한 삶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래 5편의 전기 영화를 통해 치열하고 외로운 퀸들의 세계를 엿본다.

엘리자베스(1998)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1554년 잉글랜드, 구교 신봉자인 메리 1세가 다스리고 있는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죽음을 앞에 둔 메리 여왕은 신교도 박해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신교도인 여왕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케이트 블란쳇)는 모함으로 인해 사형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나고 메리는 임종을 맞는다. 그러나 여왕은 국가를 위해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옛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사실까지 전해 듣고는 큰 실망에 빠진다. 모두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 엘리자베스는 정치에만 몰두하기 시작한다.

영화 [엘리자베스]는 3살엔 사생아였고 21살엔 사형수였지만, 25살엔 세계를 지배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이다. 그는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한 군주였으며, 평생 미혼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랑과 정치, 음모 등 여러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점차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신인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이 엘리자베스 1세 역할을 맡아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후 영화 [골든 에이지]를 통해 10년 만에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기도 했다.

철의 여인(2011)

이미지: 필라멘트픽쳐스

스물여섯의 야심만만한 옥스포드 졸업생 ‘마가렛’(메릴 스트립)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야심차게 지방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이후 남편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영국의 최초 여성 총리로 선출되고,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막대한 권력과 세계적 정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떨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신념과 정책을 당당히 추진하지만, 이내 각료들과의 격렬한 대치로 물러날 위기에 처한다.

[철의 여인]은 세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여성 ‘마가렛 대처’의 정치 인생과 노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역대 보수당 최장수 내각, 전후 최장수 내각이며 현대 영국 보수당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남성들의 세계라 여겼던 정치계에 뛰어들어,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카리스마를 통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주연을 맡은 메릴 스트립은 “마가렛의 싸우고자 하는 열정, 싸움에 대한 욕구가 흥미로웠다”고 밝혔다. 생전이나 사후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지만,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늘 그랬듯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여주며 ‘철의 여인’ 그 자체가 되었고,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재키(2016)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주)

1963년, 충격적인 암살 사건으로 존 F. 케네디 대통이 사망하면서 남겨진 부인 ‘재클린 케네디’(나탈리 포트만)는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남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슬픔을 달랠 새도 없이, 의연하게 장례식을 준비해야 한다. 더 이상 퍼스트 레이디가 아닌 재키는 백악관을 지휘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곧 자신이야말로 남편의 시대를 마무리할 수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재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전후를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관점에서 그린 영화이다. 모두가 사랑한 퍼스트 레이디 재키는 미적 감각 또한 높았으며, 영화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재키룩’을 구현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특히 케네디 암살 당시 입었던, 비극과 상반되는 분홍색 수트는 재키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 전체가 당시를 그대로 재현했다 말해도 좋을 정도로 당시 재클린 케네디와 인물들의 패션,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 고스란히 반영됐다.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을 맡아 다양한 ‘재키룩’ 스타일을 완벽히 소화했고, 연기 또한 호평을 받았다.

더 퀸(2006)

이미지: (주)프라임엔터테인먼트

1997년 8월, 영국 왕실에서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이미 왕실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다이애나 비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고, 영국 국민은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정작 엘리자베스 2세(헬렌 미렌) 여왕은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내놓지 않고, 국민들과 각종 언론들은 이런 여왕의 태도를 연일 비난한다. 새로 부임하게 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멀어지기만 하는 왕실과 국민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여왕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더 퀸]은 자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내놓을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인간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여왕이기에, 전통과 명예를 지켜야 하기에,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혀야 했으며,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교육받았다. 여왕의 화려한 왕관 뒤에 가려진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가장 화려한 동시에 가장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영국 왕실과 다이애나 비의 죽음이라는 다소 민감하면서도 흥미로운 소재를 과감히 보여줬고, 세계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헬렌 미렌이 주연을 맡아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아래 소개할 마지막 영화, [스펜서]와 연이어 보면 더욱 다채로운 관람을 할 수 있다.

스펜서(2021)

이미지: ㈜영화특별시SMC

영국 왕실 가족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기 위해 샌드링엄 별장에 모인다. 그곳으로 향한 왕세자비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음식조차 제대로 삼킬 수 없지만, 간신히 의상 담당자 매기와 두 아들에게 의지하면서 고통스러운 휴가를 보낸다. 폐쇄적인 그곳에서 다이애나는 의심과 결심 사이를 오가며, 결국 왕비가 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로 결심한다.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는 따뜻한 카리스마와 선한 영향력으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영화 [스펜서]는 세기의 아이콘으로 불린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주연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이애나의 억양과 제스처, 헤어스타일까지 완벽히 소화했고, 탁월한 캐릭터 해석으로 전 세계의 극찬을 이끌어 냈다.

이 영화를 보면 왕위에 오른 찰스 3세(당시 찰스 왕세자)가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왜 이렇게 여론이 안 좋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 반대로 ([더 퀸]에서 묘사한 것처럼) 왜 영국 왕실이 유독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에 미적지근하게 대처했는지도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