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주)영화사 안다미로 Andamiro films

최근 웰메이드 영화를 배급하며 어느새 ‘믿보’급 배급사로 거듭난 A24의 2022년 공개작 [애프터썬]은 햇볕에 그을린 자국처럼 선연하게 남아있는 그 해 여름의 한 조각을 담아낸 작품이다. 제75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프렌치 터치 심사위원상 수상작이자 샬롯 웰스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그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녹아 있는 자전적 영화이기도 하다. 드라마 [노멀 피플]로 이름을 알린 라이징 스타 ‘폴 메스칼’과 8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천재 신예 ‘프랭키 코리오’가 완벽한 부녀 연기를 선보였고, 이 작품으로 두 사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박하고 잔잔한 영화 [애프터썬]이 큰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 신예들의 빛나는 시너지 덕분이었다.

[애프터썬]이 보여주는 캠코더 영상 속에는 젊은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11살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현재 어른이 된 소피는 생일 날, 아빠가 나오는 꿈을 꾸다가 오래된 캠코더를 떠올리고 영상을 틀어 본 것이다. 그렇게 부녀의 그 해 여름이 다시 재생된다. 그동안 자신에게 소홀했던 아빠와 처음으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동안, 소피는 어떻게든 자신을 즐겁게 해 주려는 아버지에게서 새로운 이면을 보게 된다. 따뜻한 태양 아래 마냥 즐거운 기억인 줄 알았는데, 아빠는 홀로 거대한 슬픔과 싸우고 있던 것이다.

남매 사이로 오해받을 만큼 나이 차가 크지 않은 이 부녀에게 그 여름은 특별했다. 소피의 부모는 이미 헤어진 사이이며, 아빠 캘럼은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떠나 런던에 자리를 잡으려 애쓰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종종 딸과 휴가를 보내는 것으로 아빠로서의 소임을 조금이나마 채운다. 물론 캘럼은 소피를 무척 사랑한다. 다만 이제 막 30대가 되어 감당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슬픔의 깊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11살이 된 소피는 아빠의 미묘한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며, 영화는 심연의 깊이로 우리를 인도한다.

같은 태양 아래, 엇갈린 마음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주)영화사 안다미로 Andamiro films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깜짝 이벤트까지 준비할 줄 아는 귀여운 딸 소피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가 11살이라면 지금 뭘 할 것 같아?” 또래에 비해 다소 시니컬해 보이지만 아이답게 호기심이 많고, 이제 막 소녀의 세계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소피에게 세상은 흥미롭다. 어떻게 하면 제일 신나는 11살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 캘럼의 유년은 그리 밝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서 축하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 생일의 기억을 떠올린다. “조금 슬프군요”라는 소피의 반응에는 “괜찮아”라고 답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캘럼은 쓸쓸하고 외롭다. 한 번 고향을 떠나온 그는 이제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캘럼은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느꼈던 결핍을 소피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고, 그래서 아내와는 헤어졌더라도 여름마다 소피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11살이 된 소피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소피가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호신술을 가르쳐주고, 소피가 ‘이상하다’고 여기던 움직임도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배우게 해 주겠다, 만약 니가 나이가 들어 어떤 나쁜 짓을 하게 되더라도 아빠에게는 이야기해도 괜찮다고도 말한다. 종종 캠코더를 꺼내 소피의 모습을 남기면서까지, 캘럼은 끝까지 좋은 아빠로 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소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캘럼은 자신 안의 혼란과 싸운다. 명상과 시 쓰기에 대한 책을 옆에 두고, 이따금 높은 난간 위에 맨발로 서고, 홀로 밤바다에 뛰어들거나 아이처럼 눈물을 쏟기도 한다. 어쩌면 자신을 실패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해야 마땅할 인간으로서, 강인해야 할 남자로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부모로서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캘럼에게 이번 여행은 마지막 기회였고, 그래서 더욱 최선을 다했을 테다. 그러나 불행히도 캘럼은 곧 깨닫는다. ‘나는 부모로서도 실패했구나.’ 자신의 무심한 부모와 달리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을 캘럼은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이 도저히 넘어서지 못할 한계를 느낀 듯하다.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보는 이의 착잡함은 더 커진다.

‘당신이 애쓰는 걸 봤다고 생각했어요’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주)영화사 안다미로 Andamiro films

‘당신의 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당신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애쓰는 걸 봤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꿈이었을 뿐’ 여행 내내, 아빠에게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던 소피는 노래를 통해 진심을 전했다. ‘내가 틀렸다면 정확한 답을 주세요’ 라고. 11살 아이가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 지쳐 보이는 아빠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테다. 그러나 캘럼은 대답 없이, 소피에게 어려운 숙제를 남기고 떠났다. ‘무엇이 당신을 외롭게 만들었을까?’라는 영영 풀리지 않는 숙제.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은 태양 아래 있으니까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다’던 소피의 마음은 결국 캘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같은 태양 아래에 있지만 다른 마음을 가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한발이 빠르기 때문에. 그러나 부모가 된 현재의 소피는, 어렴풋이 느꼈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캘럼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다. 여전히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이제 소피와 캘럼은 다른 태양을 바라보며,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리 헤아려도 부모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을 때, 자식은 언제나 억울하다. 당신의 성장을 지켜볼 수 없던 것이 나의 탓은 아닌데. 나에게도 당신의 심연을 들여다볼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가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영화 [애프터썬]은 아마 그런 마음에서 만들어진 듯하다.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기억하려 애쓰는 몸짓’으로 읽힌다. 그 모호하고 연약한 몸짓 자체가 사랑이라면, 소피는 오래오래 캘럼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운 아빠 혹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한 인간으로서. 어린 내가 한 번을 안아주지 못한 쓸쓸한 존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