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과 동시에 신인상을 휩쓸었던 배우 이제훈은 당시 ‘괴물 신인’, ‘충무로의 신데렐라’라고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충무로의 대표배우로 성장했다. 그가 2023년에는 이종필 감독의 액션 스릴러 영화 [탈주], 김한민 감독의 사극 액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통해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출 예정이다. 특히 구교환과 이제훈의 만남이 성사된 [탈주]는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재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크게 활약하고 있지만, 역시 스크린에서 볼 때 더욱 반가운 이제훈의 대표작들을 살펴본다.

파수꾼(2010)

기태 역
이미지: 필라멘트픽쳐스

서로가 전부였던 세 친구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파수꾼]. 답이 없는 질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버린 소년 ‘기태’(이제훈), 기태와 절친이었지만 장례식에 오지 않은 ‘동윤’(서준영), 기태와 친구였지만 어긋나버린 ‘희준’(박정민)을 중심으로, 독단적 우정이 가져온 폭력과 상처의 전염을 그려낸다. 미성숙한 소통이 낳은 오해와 비극적인 파국을 통해, 관계의 복잡한 심리를 파헤친 [파수꾼]은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성공한 사례이다. 10대들의 섬세한 감수성과 소년들 사이 은밀하게 존재하는 권력관계, 소통의 부재 등을 훌륭하게 풀어냈고,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까지 녹여냈다. 여기에 생생한 감정과 사실적인 묘사, 생각을 자극하는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이 더해져 완성도를 높였다. 인물의 어두운 심리까지 진정성 있게 포착한 윤성현 감독은 이 장편 데뷔작을 통해 크게 주목받았고, 비극의 중심에 놓인 ‘기태’를 연기한 이제훈은 대종상, 청룡영화상 등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더불어 이제훈, 박정민, 서준영이라는 보석 같은 배우들의 풋풋한 모습까지 만나볼 수 있다.

고지전(2011)

신일영 역
이미지: ㈜쇼박스

1951년 6월 전선 교착 이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쟁은 끝났고 이제 모든 전선은 ‘고지전’으로 돌입한다. 25개월간 서로 싸우는 이유조차 잊은 채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싸우다 죽어간 고지 위 300만 병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고지전]. 이 영화가 기존 전쟁영화과 다른 이유는 우리가 몰랐던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쟁을 조명했기 때문이다. 전쟁영화는 많았지만 ‘한국전쟁이 어떻게 끝났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고, [고지전]은 ‘한국전쟁의 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동료애, 희생, 전쟁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사실 ‘전장영화’에 가깝다. 훌륭한 영상미와 강렬한 전투 장면들이 실제 전쟁터에 들어선 것 같은 생생함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장훈 감독이 연출을 맡은 [고지전]에서 이제훈은 어리지만 베테랑인 대위 ‘신일영’ 역할을 맡았다. 극심한 PTSD를 겪으면서도 동료들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항상 선봉에 서는 신일영은 끝까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이제훈은 [파수꾼]과 [고지전]에서 연이어 열연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를 충무로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건축학개론(2012)

과거 승민 역
이미지: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신인남우상 6관왕으로 충무로의 주목을 한껏 받고 있던 이제훈은 차기작으로 로맨스 영화를 선택한다. [건축학개론]은 과거 첫사랑의 기억으로 얽혀 있는 두 남녀가 15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추억을 완성하는 이야기이다. ‘건축’과 ‘사랑’의 흥미로운 상관관계를 담은 이 영화는 실제 건축공학과 출신인 이용주 감독의 데뷔작으로, 감독은 “집을 짓는 과정과 사랑하는 과정은 닮아있다”고 이야기한다. 서연의 첫사랑이자 숫기 없는 스무 살 ‘승민’을 연기한 이제훈은 그 시절의 순수함과 미숙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년 같은 얼굴을 가진 이제훈은 10살이나 어린 상대 배우 수지와 완벽한 케미를 보여줬고, 각자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풋풋한 연기 또한 호평을 받았다. 또한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오는 CD플레이어, ‘신 인류의 사랑’ 그 자체인 대학 캠퍼스, 삐삐와 헤어 무스 등 9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아이템들(농담처럼 남아있는 짝퉁 ‘제우스’ 같은)이 곳곳에 등장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첫사랑’의 감성과 아날로그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박열(2017)

박열 역
이미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실화를 그린 영화 [박열]. 1923년,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은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당한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그는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통해 젊은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신념에 대해 이야기하며, 세상을 정면으로 보고 살아가는지를 되묻는다. 주연을 맡은 이제훈은 감정적, 육체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선 청년 ‘박열’ 그 자체로 분했고, 또 한 번 인생 연기를 펼치며 뜨거운 여운을 선사했다.

아이 캔 스피크(2017)

박민재 역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주)리틀빅픽쳐스

민원왕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과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의외의 우정을 그린 휴먼 코미디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차 세계대전의 생존자인 옥분은 영어로 꼭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민재에게 영어를 배우고, 사제관계로 얽힌 두 사람은 이 영어 수업을 통해 특별하고 따뜻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의 당선작인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발랄하게 비틀어냈고, 용기 있게 전 세계 앞에서 증언한 옥분의 진취적인 삶의 태도는 진한 감동을 전했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공감력, 섬세한 연출력을 가진 김현석 감독이 세대 간의 연결과 소통의 힘을 그려낸 작품이다. 나문희와 이제훈은 세대를 뛰어넘어 완벽한 호흡을 뽐냈고, 감독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잘하는 두 배우의 충돌을 보는 맛이 있었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사냥의 시간(2020)

준석 역
이미지: 넷플릭스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네 친구들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범죄 스릴러 영화 [사냥의 시간]. 희망 없는 도시, 감옥에서 출소한 ‘준석’(이제훈)은 가족 같은 친구들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 그리고 ‘상수’(박정민)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위한 위험한 작전을 계획한다. 하지만 이내 무자비한 암살자의 표적이 되고, 심장을 조여오는 지옥 같은 사냥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비주얼텔러’로 거듭난 윤성현 감독이 암울한 근미래 한국을 그려냈고, 이 새로운 세계관에 극한의 서스펜스까지 더해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시켰다. [파수꾼]에 이어 윤성현 감독과 재회한 이제훈은 위험한 계획의 설계자인 준석 역할을 맡았고, 준석은 꾸미지 않은 듯하지만 내재된 멋과 카리스마를 품고 있다. 강렬한 액션이 돋보이는 추격전과 총격전 장면에서 그 카리스마가 제대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