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오펜하이머]가 개봉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세계대전에 큰 영향을 끼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명과 암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 작품을 기다린 이유는 오펜하이머의 전기보다, 영화를 연출한 그 이름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 주인공이다.

놀란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메멘토]다. 흑백과 컬러가 혼합된 복잡한 플롯과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로, 그야말로 저예산 고재미라는 가성비 갑인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놀란은 다양한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엔딩의 갑론을박을 낳고 있는 [인셉션]을 비롯해, 국내 천만 관객을 돌파한 SF 영화 [인터스텔라], 현장감이라는 것이 폭발한 전쟁영화 [덩케르크], 코로나 시대에 개봉했지만 여전히 영화감상의 유희를 건넨 [테넷]까지. 그가 연출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영화는 그 해 최고 화제작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물어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고 작품은 무엇인가?” 워낙 후보군이 많아 뭐를 고를지가 더 고민이다. 그럼에도 근 15년 동안 바뀌지 않은 에디터의 최애작이 있으니, 그 이름도 숭고한 [다크 나이트]다. 이 작품은 영화사에 많은 것을 바꿨다. 오락영화의 한계에 갇혔던 슈퍼히어로 영화가 클래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우리 곁을 먼저 떠났지만, 그야말로 미친 연기로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은 히스 레저의 잔상도 있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력이 블록버스터에도 유효함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놀란의 필모는 [다크 나이트] 3부작 전과 후로 나눠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펜하이머]로 다시 극장가에 돌아온 세계적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최근 모 TV 쇼에도 출연해 한층 더 우리에게 친숙한 그의 영화 인생을 돌아보며, 슈퍼히어로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다크 나이트] 3부작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크리스토퍼 놀란 연출 이전 침몰 직전의 배트맨 시리즈

[배트맨과 로빈] 워너 브라더스

1989년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은 할리우드 호사가들의 부정적인 예상과 달리 흥행과 비평 모두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배트맨 2]도 좋은 반응을 얻으며 어느새 워너 브라더스의 대표 프랜차이즈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배트맨: 포에버]부터 시작된다. 조엘 슈마허가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팀 버튼의 [배트맨]이 어둡고 심각하다는 피드백을 수용해, 최대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로 탈바꿈한다. 그 전략은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아쉽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결국 이 불행의 씨앗은 1997년작 [배트맨과 로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개봉 때마다 북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했던 [배트맨]이었지만, 이 작품은 1억 달러를 조금 넘게 벌이는데 그쳤다. 전 세계적으로 고작 2억 3천 8백만 달러를 벌었는데, 이 수익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배트맨 프랜차이즈 최저 흥행이다. 비평면에서도 참패를 당했다. 너무 가볍고, 엉망진창이라는 평가 속에 시리즈를 이어갈 원동력마저 잃었다.

이에 큰 위기를 느낀 워너 수뇌부는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완전히 새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에 여러 연출가를 살펴보던 중 [메멘토]와 [인썸니아]로 범죄, 스릴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새 배트맨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배트맨 비긴즈 (2005)

워너 브라더스

사실 새 [배트맨] 시리즈에 가장 근접한 감독은 놀란이 아니었다. [파이] [레퀴엠]의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유력했다. 그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배트맨: 이어 원]을 바탕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스튜디오는 이 작품이 너무 심각하고 어둡다는 이유로 제작을 취소했다. 이어 바통을 잡은 자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여담으로 대런은 배트맨 역에 호아킨 피닉스를 마음에 두었다고 밝혔다. 그랬다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겠다.

어쨌든 리부트 된 [배트맨] 시리즈의 메가폰을 잡은 놀란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며 프랜차이즈의 새출발을 시작했다. 브루스 웨인의 성장담과 배트맨의 활약을 적절하게 접목시키며 탄탄한 작품을 만들어간다. 놀란은 처음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해 부담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저예산으로 찍겠다고 했지만, 스튜디오에서 거절해 지금의 대규모 제작비가 들어간 [배트맨 비긴즈]로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대 성공을 거뒀다. 전 세계적으로 3억 5천 6백만 달러를 벌어들여 [배트맨과 로빈]의 악몽을 완벽하게 지워냈다. 크리스찬 베일은 브루스 웨인 역을 맡아서 자신의 연기 포텐을 터트렸고, 지금은 놀란의 페르소나가 된 길리언 머피가 극중 메인 빌런 스케어크로우로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크 나이트 (2008)

워너 브라더스

[배트맨 비긴즈]의 성공 뒤로, 3년 만에 후속편 [다크 나이트](2008)가 개봉했다. 지금이야 ‘배트맨=다크 나이트’라고 할 정도로 친숙해졌지만, 당시에는 많이 낯선 제목이었다. 배트맨이라는 확실한 브랜드를 버리고 닉네임이나 다름없는 [다크 나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놀란 감독은 배트맨이 [배트맨 비긴즈]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커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담의 평화가 무너지기 직전이지만, 자신을 희생해 정의를 지키려는 그 절박함과 엄숙함이 배트맨이라는 이름보다 이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튜디오의 반대는 컸다. 몇 십 년 동안 쌓아 온 배트맨의 브랜드 파워가 있기에, [배트맨: 다크 나이트]라는 부제를 제안했다. 하지만 놀란은 끝까지 [다크 나이트]를 고집해 지금의 제목이 되었고, 이 선택은 영화 작명 센스에 신의 한 수로 다가왔다.  

[다크 나이트]는 그야말로 슈퍼히어로 영화도 [대부]못지 않은 클래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선과 악의 완벽한 대결을 그린 플롯, 치열하게 탐구하는 히어로의 고뇌, 빌런 조커의 경이적인 퍼포먼스, 엔딩에서 밝혀지는 소름 돋는 제목의 의미 등, 그야말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영화로 탄생되었다. 이 같은 완성도는 흥행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2008년 개봉 첫 주말에 역대 북미 박스오피스 오프닝 기록을 세웠고, 월드와이드로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2008년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10억 달러를 돌파한 것은 [다크 나이트]가 최초였다.

히스 레저의 명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조커가 조커를 연기한 듯한 그의 열연은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전했다. 아쉽게도 개봉을 앞두고 유명을 달리했지만,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그의 열연은 인정받았다.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 최초 연기상이라 더욱 뜻깊었던 결과다.

[다크 나이트]가 끼친 영향은 흥행과 비평 외에도 더 있다. 평론가와 관객이 인정한 2008년 올해의 영화였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부문에서 외면 받았다 이에 분노한 영화팬들이 오스카 시상식에 비판을 가했다. 결국 이듬해 오스카는 기존 5편의 작품상 후보를 10작품으로 늘리는 강수를 둔다. 공식적으로 오스카는 이 같은 변화가 [다크 나이트] 때문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영화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여담으로 한때 국내에서는 이 작품이 미개봉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도 컸다. 북미 개봉일 이후에도 이렇다할 국내 개봉일이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배트맨] 시리즈가 국내에서 흥행이 저조했기에([배트맨 비긴즈] 국내 흥행이 고작 90만 정도), [다크 나이트]는 2차 시장으로 바로 직행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있었다. 지금 [다크 나이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각이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2012)

워너 브라더스

[다크 나이트]의 신화적인 성공 뒤로 대부분 사람들은 당연히 다음 이야기가 준비 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하인드에 의하면 놀란은 [다크 나이트]까지만 연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배트맨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미 두 편의 배트맨 영화로 모두 풀어냈다고 생각했다. 허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놔둘 수 없었던 스튜디오의 끈질긴 설득과 3부작으로 완벽하게 매듭짓고 싶었던 놀란의 변심(?) 때문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3부작의 마지막인 만큼 여러모로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와 많이 연결된다. [배트맨 비긴즈]의 악당 라스 알 굴의 딸 탈리아 알 굴이 등장하며, [다크 나이트]에서 죽은 하비 덴트의 그림자가 이야기 내내 스며 있다. 이전에 겪은 사건으로 실의에 빠진 브루스 웨인이 다시 힘을 낸다는 서사 역시 [다크 나이트]와 큰 접점이 있다. 만약 히스 레저가 살아있었다면 이번 작품에 깜짝 출연했을 것이라는 여담도 있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여러모로 놀란 사단의 발화점이 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 처음 참여한 조셉 고든 래빗, 톰 하디, 마리옹 꼬띠아르, 앤 해서웨이는 [인셉션], [덩케르크], [인터스텔라] 등 놀란과 계속해서 작업을 함께했다. 놀란 감독은 이 같은 이유를,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의 숨은 잠재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만 [다크 나이트]의 엄청난 평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쉽다는 언급도 많다. 하지만 3부작를 확실하게 끝내고, 반전과 여운과 감동이 뒤섞인 엔딩 때문에, 시리즈의 마지막 역할은 충실했다는 대체적인 평가다. 흥행은 전작 [다크 나이트] 때문에 높아진 기대감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10억 8천 2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뒀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크리스토퍼 놀란 연출작 최고 흥행 작품이자, [배트맨] 프랜차이즈의 최고 수익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