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아리랑시네센터에서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열렸다.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들며 관객과 만났던 신수원 감독의 전작들을 돌아보는 기획전이 있었다. 이름하여 [신수원 감독전: 레인보우부터 오마주, 13년]이다. 신수원 감독의 작품 상영은 물론, 출연 배우들이 함께하는 GV 시간도 가졌다.

모든 영화인들이 그렇지만, 신수원 감독은 특별한 케이스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원래 중학교 교사 일을 하다가, 영화를 하고 싶어서 무작정 이쪽 세계에 들어왔다고. 몇몇 지인들은 방학에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그의 도전을 말렸지만, 뭐 하나에 빠지면 거기에 올인 한다는 신수원 감독의 열정 덕분에, 우리는 한국영화를 지탱하는 괜찮은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신수원 감독은 교사 시절에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 대부분은 현실 부조리를 꼬집고, 비판한다. 보고 나면 씁쓸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주제의식 면으로 좋은 완성도를 가졌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뼈 때리는 우화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주제의식을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판타지 등 장르적 매력과 결합해 흥미롭게 구성한다는 점이다.

몇몇 작품에는 그의 특이한 영화계 입문 이력을 녹아낸 자전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속에서 빚어지는 일상 에피소드들이 따뜻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데뷔작 [레인보우]를 보면 더더욱 신수원 감독, 아니 인간 신수원의 좌충우돌을 옆에서 보는 기분이라, 한결 더 그와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억압과 시스템의 한계에서 고통받는 주인공부터 자신의 이미지가 투영된 [레인보우]와 [오마주]의 영화 감독까지, 현실적인 고민을 담은, 치열하고도 섬세한 시각에서 풀어내는 여성 서사는 그의 작품에 더욱 빠지게 한다.

신수원 감독하면 근면성실하다는 표현도 잘 어울릴 듯하다. 2010년 데뷔작을 시작으로 2022년 [오마주]까지, 2-3년간 꾸준히 신작을 내놓았다. 이번 기획전 GV에서 각본을 쓰는 것이 연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토로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그가 내보일 또 다른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쉽게 기획전은 지난 주말에 막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리뷰를 통해서 신수원 감독의 시작부터 지금 까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마련해본다.

명왕성

준필름

[명왕성]은 신수원 감독의 이름을 알리게 한 작품이다. 명문 사립고에서 1등을 하던 학생이 사체로 발견되고, 이 사건과 관련된 비밀 스터디 그룹의 경쟁과 악행을 그린다. 칸. 베를린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호평받으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 더 나은 등수와 대학을 위해 친구도 배신하는 극중 이야기에 혀 끝을 차면서도, 이 역시 현재 대한민국 교육의 어두운 단면임을 체념케 하는 날카로운 연출력이 놀랍다. 지금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 중인 이다윗, 성훈, 김꽃비, 류경수 등의 초창기 모습을 만나는 것도 이 작품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다.

마돈나

준필름

[명왕성]이 신수원 감독의 이름을 알리게 했다면 [마돈나]는 그야말로 폭발하는 그의 연출력을 확인하는 작품이다. 어느 병원의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해림(서영희)이 정체 불명의 환자 미나(권소현)을 만나고, 모종의 거래 때문에 그의 과거를 따라가면서 벌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68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고, 35회 하와이국제영화제 극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신수원 감독의 남다른 연출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삶의 궁지에 몰렸던 두 여자의 인생과 감정을 공감가게 표현했고, 이를 악용하려는 사회와 기득권의 욕망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특히 두 주인공을 연기했던 서영희와 권소현의 열연은 압도적이다. 미나의 한 많은 삶을 되짚어가면서 자신을 자책하는 해림의 모습은 분노와 슬픔 그 이상의 감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때린다. 신수원 감독의 작명센스도 빛난다.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유린당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마돈나’라는 반어적인 제목으로 연결시키며, 작품의 의미를 스산하게 되짚어본다.

유리정원

준필름

저예산 속에서도 범죄, 스릴러 등 장르적인 매력을 잘 빚어냈던 신수원 감독이 이번에는 현실 판타지, 혹은 숲속 판타지[?]에 도전한다.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유리정원]은 무명작가 지훈(김태훈)이 세상에 큰 상처를 받고 자신만의 정원으로 도피한 과학도 재연(문근영)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 이후 문근영이 11년만에 스크린 주연작으로 컴백해 많은 화제를 낳았다. 영화 내내 계속되는 초록 향연 속에 엽기적이고 기괴하지만, 주인공 당사자들에게는 순수했고, 절박했던 이야기가 다양한 감정을 배가한다. 영화의 메인 무대인 울창한 숲과 자연 경관, 작품의 감성을 고조시키는 음악, 극중 소설로 풀어내는 액자식 구성 등 여러모로 신수원 감독 영화 중 미학적 구성이 가장 돋보인다. 여기에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문근영의 파격적인 변신과 믿보급 연기력, 인간과 나무를 대비하며 점차 완성해가는 신수원 감독의 판타지가 인상적이다.

젊은이의 양지

준필름

[젊음이의 양지]는 세 사람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채권 추심 콜센터의 센터장 세연과, 그의 밑에서 일을 배우는 사회 초년생 준, 그리고 취업준비생이자 세연의 딸인 미래.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그렇게 열과 성을 바쳤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젊은이의 양지]는 제목과 다르게 젊은이, 아니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이들의 음지를 밀도 있게 그린다. 청년 취업문제부터 비정규직의 불합리한 처우, 성과 제일주의의 폐해까지, 자신의 이름보다 직책이 더 중요한 이 시대에 ‘사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진지하게 되묻는다. 아쉽게도 영화는 세 사람의 운명을 뒤바꾼 비극을 막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때처럼 거기에 체념해서는 안됨을 힘주어 말한다. 시스템은 여전히 사람을 갈아내고, 경쟁은 반복되겠지만, 비극을 멈출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의 선택과 의지임을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노래 ‘루시드 폴-사람이었네’가 유난히 구슬프게 다가온다. (마치 이 노래를 위해서 영화를 만든 것처럼) 사회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면서도 인간애를 놓치지 않는 신수원 감독의 연출력이 다시 한번 빛나는 작품이다.

오마주

준필름

극중 주인공들이 사투를 벌이면서도 항상 비극을 맞이해서 그랬을까? 신수원 감독의 신작 [오마주]는 지금까지 그의 영화와 결이 많이 다르다. 모처럼 영화를 보고도 고구마 없이 기분 좋게 극장문을 나서게 한다. 잇따른 흥행 실패로 슬럼프에 빠진 영화감독 지완(이정은)이 60년대에 활동한 한국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 홍은원 감독의 작품 [여판사]의 필름을 복원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감독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흡사 그의 초기작 [레인보우]의 속편 같은 느낌도 든다. 물론 다른 작품보다 여유(?)와 따뜻함이 있다고 해서 신수원 감독의 날카로움이 녹슬지는 않았다. 여성 영화인을 편견과 고정 관념으로 핍박하던 시대의 한계와 비판이 영화 내내 스며 있다. 그럼에도 홍은원 감독을 비롯한 이들의 이상을 이어가며 다시 한걸음 내딛으려는 지완의 모습은 박수와 응원을 동시에 건네게 한다. 과거는 물론 지금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여성 영화인들을 향한 격려와 함께 말이다. 이 같은 감정은 [레인보우]에서부터 [오마주]까지 쉼 없이 달려온 신수원 감독에 대한 기대감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하루 빨리 그의 신작을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