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은 한국영화계에서 매우 중요한 한 해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붐을 일으킨 한국영화 르네상스에 기름을 부어서 활활 타오르게, 아니 거의 폭발시켰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요즘 말대로 한국영화, 폼 미쳤다! 매달 마다 지금도 화자 되는 전설적인 작품이 쏙쏙 나왔다. 여기에 지금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의 신작 혹은 초기작들이 대거 개봉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다시 보기 힘든 전성기를 이뤄냈다. 그래서일까? 최근 2003년을 대표하는 한국영화들이 여러 특별전이나 재개봉으로 다시 관객과 만나고 있는 중이다. 팬데믹 기간을 거쳐 여러모로 침체에 빠진 영화계에, 2003년만큼 한국영화의 붐이자 봄은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바람과 함께 2003년의 걸작들을 되돌아보고, 이 작품을 만든 감독들의 지금을 살펴보자.

살인의 추억 (2003년 4월 25일 개봉) – 봉준호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 아니 세계 영화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우뚝 선 봉준호. 하지만 그도 데뷔작에서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2000년 개봉작 [플란다스의 개]가 비평면에서는 좋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흥행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데뷔작 실패 감독에게 두 번의 기회는 거의 없기에, 당시 그의 미래는 많이 불투명했다. 그렇기에 2003년에 개봉한 [살인의 추억]의 가진 의미는 남다르다. 웰메이드 한국영화를 만난 것은 둘째 치고, 이 작품이 없었다면 한국영화사에서 봉준호의 이름은 자취를 감췄을지도 모르니깐.

연극 ‘날 보러와요’를 각색한 [살인의 추억]은 여러모로 신선했다. 연쇄살인사건 범인을 잡는 형사의 고군분투 그 이상으로, 당시 사회를 향한 냉소와 풍자가 넘쳤다. 무엇보다 (개봉 당시에는) 범인을 잡지 못해 제목 그대로 ‘살인을 추억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패배를 흡입력 있게 그려냈다. 봉준호의 유력한 연출력과 배우, 스탭들의 힘으로 이뤄낸 최상의 결과였다. 그 결과 [살인의 추억]은 비평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500만 관객이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봉준호는 이 성공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맘껏 펼칠 수 있었다. 차기작인 블록버스터 [괴물] 역시 대단한 업적을 거뒀고, [마더], [설국열차] 그리고 [기생충]까지, 전 세계는 봉준호에 열광했다. 이 같은 의미 때문인지 [살인의 추억]은 개봉 2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매체로 관객과 다시 만나는 중이다. 영국, 미국 등에서 최근 4K 리마스터링을 거쳐 재개봉을 했고, 국내에서도 4K 블루레이를 발매 준비 중이다.

장화, 홍련 (2003년 6월 13일 개봉) – 김지운

이미지: 청어람

한국 공포영화는 [장화, 홍련] 개봉 전과 후로 나눠지지 않을까? [장화, 홍련]은 마이너 장르라고 평가받던 호러 무비도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당시 신예 배우였던 임수정, 문근영을 발굴했다. 무엇보다 매 작품마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김지운 감독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장르 마스터’라는 그의 칭호가 [장화, 홍련]의 성공 이후 불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미장센과, 보면 볼수록 공포보다 슬픔이 더 큰 이야기,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음악 등 이 작품의 완성도는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공포영화의 교과서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김지운 감독은 임수정과 다시 만나 [거미집]을 만들었다. [장화, 홍련] 이후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었던 두 영화인이 재회만으로도 반갑다. 20년 전 모두가 안된다는 공포영화로 신드룸을 일으켰던 두 사람의 시너지가 이번에는 어떻게 발휘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올드보이 (2003년 11월 21일 개봉) – 박찬욱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2003년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상반기는 봉준호, 하반기는 박찬욱이었다. 그만큼 상반기에 개봉한 [살인의 추억]를 향한 대중과 비평의 열광적인 반응이, 하반기 [올드보이] 개봉으로 고스란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동명 일본 만화를 각색한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의 상업적인 실패 속에 다음이 불투명했던 박찬욱 감독에게 재기의 발판이 된 작품이다. 탄탄한 스토리는 물론, 음악, 영상, 세트 등 박찬욱 스타일의 꼭짓점이자, 진정한 출발이었다. 그만큼 여러 번 볼수록 작품의 진가는 더해간다. 아직도 계속되는 엔딩의 해석 등 텍스트의 생산량 역시,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처럼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섬세한 이미지의 향연과, 모호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이야기의 유혹은 어느새 박찬욱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개봉 당시에도 [올드보이]는 상당한 열풍을 일으켰지만, 다음해 칸국제영화제 수상이후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한다. 2003년 국내 개봉한 작품을 이례적으로 2004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 현지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결국 폐막식 당일,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영화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이후 [올드보이]에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한 단계 넓혔다. 최근 북미에서 재개봉을 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중인데, 국내에서도 곧 [올드보이]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황산벌 (2003년 10월 17일 개봉) – 이준익

이미지: 씨네월드

이준익은 사극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왕의 남자]를 비롯해, [동주], [자산어보], [박열] 등 그의 필모에는 역사의 숨결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건 사극을 만들었을까? 아마 2003년에 개봉한 [황산벌]이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황산벌]은 역사적인 팩트인 신라와 백제의 전쟁을 픽션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영화는 ‘거시기’를 비롯한 지역 사투리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아니 거의 영화의 핵심적인 코드다. 극중 사투리는 개그 코드는 물론, 지역 고유의 문화와 정서로도 활용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독특한 사극을 만들어냈다. 역사의 진실을 너무 코믹하게 해석하지 않았나라는 비판도 있지만, 오히려 이 과정에서 현대 정치와 외교 태세를 꼬집는 메시지와 영화적 해석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러모로 역사 비틀기는 이렇게 해야함을 보여준 작품이다. [황산벌]의 성공으로 이준익 감독은 계속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사극을 만들 수 있었고, [왕의 남자], [동주], [자산어보] 등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들을 내보이고 있다.

실미도 (2003년 12월 24일) – 강우석

이미지: 시네마서비스

매월마다 레전드 한국영화들이 개봉한 2003년, 그 대미를 장식한 작품은 [실미도]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684 부대와 실미도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 실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여기에 설경구, 정재영, 안성기, 허준호 등 지금도 충무로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영화에 힘을 실었다.

[실미도]의 가치는 한국영화 최초 천만 관객을 연 작품이라는 점이다. 지금이야 흥행의 척도를 천만 관객으로 정하지만, 당시만해도 한 영화가 그 정도의 관객을 모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실미도]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해 끝이 없는 매진 행렬로 당시 한국영화 박스오피스의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한국영화 시장의 한계를 한 뼘 더 넓혔다. 흥행은 물론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목소리도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684부대가 재조명되었고, 관련 사건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했다. [실미도]는 당시 충무로 최고의 파워맨 강우석 감독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작품이다. 이후에도 그는 [공공의 적] 시리즈, [이끼] 등 여러 흥행작을 내놓았지만, [고산자: 대동여지도] 이후 연출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강우석 감독의 힘 있는 연출이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