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성 정체성의 공존을 외치는 LGBTQ+ 문화는 세계적으로 친숙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LGBTQ+를 다룬 영화를 마주할 때, 우리는 보다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 문화가 더욱 과감하고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부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더욱 다채롭게 물들인 LGBTQ+ 영화 다섯 작품을 소개한다. 부산에서 뜨거운 열기를 바탕으로 곧 일반 극장에서도 만나길 바란다.

[우먼 오브] (2023) ㅡ 놀랍도록 따뜻하고 상냥한 사랑

NO-MAD FILMS

작은 마을에서 반평생을 아담으로 살아온 아니엘라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아이의 가장이자 평범한 사무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담의 인생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님과 아내가 애써 외면해 온 비밀과 거짓으로 가득하다. 아니엘라는 폴란드 격동의 역사 속 개인사의 격랑을 겪지만,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도 한 걸음씩 내딛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놀랍도록 따뜻하고 상냥한 사랑이 놓여 있다.

남성의 신체에 갇힌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우먼 오브]. 세계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월드 시네마 부문에 선정되었다. 20년 이상 함께해온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와 미할 엔그레르트가 공동 연출이 빛나는 작품이다. 특히 [엘르](2011), [인 더 네임 오브](2013), [바디](2015) 등의 작품을 통해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 특유의 매혹적인 색채가 짙게 느껴진다. 여전히 ‘성’의 혼돈과 파란을 과감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두 감독은 [우먼 오브]의 이러한 주제의식을 중요하게 언급하며, 영화가 세계적으로 반향을 얻길 바란다고 전했다.

[녹야] (2023) ㅡ 푸른 밤의 긴 모험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진샤’(판빙빙)는 인천 여객항 보안검색대에서 근무하는 이방인이다. 낯선 타지에서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던 그는 자신과 달리 자유로워 보이는 ‘초록머리 여자’(이주영)를 만난다. 마약 밀매상 화교 동의 애인이자 운반책인 초록머리 여자는 묘하게 시선을 끈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이끌리고,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진샤는 초록머리와 함께 모험에 뛰어들기로 한다. 예측 불가능하고 자유분방한 초록머리는 자꾸 멈춰 서려는 진샤를 이끌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돌이킬 수도, 예측할 수 없는 푸른 밤의 긴 모험을 그린 로드무비 [녹야]는 [희미한 여름](2020)으로 주목받은 한슈아이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다. 거장 감독의 신작 또는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화제작을 소개하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선정되었다. 영화는 초록머리, 녹색 불꽃 등 몽환적인 이미지들이 시각을 사로잡는다. 오랜만에 복귀한 판빙빙은 이주영과 함께 주연을 맡아, 경제적 빈곤과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연대기를 매력적으로 연기한다. 처연하고도 강렬한 스토리와 독보적인 두 배우의 에너지가 합쳐져 새로운 로드 무비가 탄생했다.

[도이 보이] (2023) ㅡ 태국의 LGBTQ+

Neramitnung Film

북부 치앙마이에서 살고 있는 쏜은 샨족이라는 종족,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신분, 게이 업소 마사지사라는 직업 등 모든 사회적 위계에서 밑바닥에 자리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자친구와 미래를 꿈꾸며 일상을 살고 있는 쏜에게 어느 날, 경찰 간부 단골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태국의 LGBTQ+를 보여준 [도이 보이]는 관광지로서의 태국이 아닌, 그곳의 치열하고 어두운 현실을 보여준다. 아시아 중견 감독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지석 부문에 선정되었다. LGBTQ+ 문화가 보다 활발한 동남아시아의 특성상 퀴어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예리하게 관찰한 사회를 세련된 시각적 표현과 편집으로 구사하는 논타왓 눔베차폰 감독의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경계에 서다](2013)를 데뷔작으로 내놓은 감독답게 [도이 보이] 또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경계와 이주민에 관한 감독의 오랜 고민과 깊은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치 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의 예술 작품을 선보였던 감독의 독특한 감각까지 더해졌다.

[사라의 수난] (2023) ㅡ 수난 같은 삶을 끌어안고 나아가자

Bosan Berisik Lab

오랫동안 도시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온 트랜스젠더 여성 사라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외딴 고향으로 돌아온다. 낯설게 변한 시골 마을은 더욱 보수화되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기억 상실증으로 그녀를 완전히 남처럼 대한다.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이 섬세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희생, 트라우마, 가족, 화해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보수적인 마을 속 트랜스젠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인도네시아 영화 [사라의 수난]. 아시아의 중견감독들과 신인감독들의 다양한 시각과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에 선정되었다. 영화 감독, 작가,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인 이스마일 바스베스 감독이 연출,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 오스카 리와라타가 주연, 인도네시아의 국민 배우 크리스틴 하킴이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선택했고, 그로 인해 많은 관계들과 어긋나 버렸다. 하지만 다시 어머니와 교감하려 애쓰며, 자기 삶의 진실과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수난 같은 자신의 삶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사라의 모습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솔리드 바이 더 씨] (2023) ㅡ 다른 세계의 충돌, 새로운 발견

Diversion

태국 남부의 작은 마을, 침식되어 가는 해변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인공구조물이 세워지고 있다. 이곳에 시각 예술가 폰이 새로운 미술 전시회 개막을 위해 찾아 온다. 숙소를 안내해 준 샤티는 그녀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동성 관계를 금지하는 전통적인 배경에 놓인 샤티의 내적 갈등이 심화된다. 문화적, 종교적 벽을 느끼며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샤티는 마침내 스스로를 발견한다.

젊은 무슬림 여성과 한 여성 예술가의 깊은 관계를 그린 태국 영화 [솔리드 바이 더 씨]. [만타 레이](2018)와 [시간의 세례](2021)의 조연출이었던 파티판 분타릭의 감독 데뷔작으로, 아시아 영화의 미래를 이끌 신인 감독들의 장편 영화를 소개하는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되었다. 주인공은 종교, 사회, 관습 등 모든 경계를 넘어서고, 금기를 깨뜨리고, 억압은 허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렇게 뜨거운 심연을 가진 주인공과 달리 영상은 편안하고 서정적이다. 태국어 원제인 [땅, 하늘, 바다]에 충실하려는 듯, 푸른 바다를 비롯한 자연과 아름다운 미술로 미학적인 영상미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