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이 두꺼워지고, 여기저기서 캐롤이 들리니 꽤 연말의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어느 도시보다 먼저 겨울을 반기는 서울은 괜히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 마음을 안고, 이 겨울을 더욱 겨울답게 맞이하고 싶은 이들에게 영화 5편을 추천한다. 모두 서울의 겨울을 담은 작품들로, 익숙하고 반가운 풍경 하나쯤 발견했으면 좋겠다.

[멋진 하루] (2008)

롯데엔터테인먼트

희수(전도연)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떼인 350만 원을 받기 위해 1년 만에 그를 찾아나선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마냥 인생이 즐겁기만 한 철없는 백수 병운(하정우)은 희수에게 빌린 350만원을 갚기 위해, 온갖 아는 여자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1년 전엔 애인 사이였고, 오늘은 채권자와 채무자로 만난 두 사람이 길지 않은 겨울 하루를 함께 보낸다. 그렇게 다시 만난 그들에게 허락된 ‘불편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일본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멋진 하루]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로드무비이다. 이윤기 감독은 서울의 낭만적인 풍경을 담백하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제작진은 40여일 동안 58곳에 달하는 서울의 구석구석에서 촬영을 마쳤고, 이렇게 만들어진 서울의 모습은 너무나 새롭다. 종로의 뒷골목, 이태원의 언덕길, 해질녘의 육교와 비 오는 날의 건널목까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풍경이지만 희수와 병운의 발자취를 따라 함께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헤어진 연인과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연인과 걸어 봤음직한, 누구나 한 번쯤은 연인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음직한 공간들을 서정적으로 담아내며 서울을 새로운 명소로 재탄생시켰다.

[뷰티 인사이드] (2015)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남자, 여자, 아이, 노인.. 심지어 외국인까지. ‘김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어느 날, 그에게 처음으로 비밀을 말하고 싶은 단 한 사람이 생겼다. 어떤 모습이건 한결 같은 태도와 친절함으로 우진을 대하던 ‘홍이수’(한효주)가 바로 그 사람이다. 과연 ‘우진’은 ‘이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판타지 멜로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CF감독 출신인 백종열 감독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감독의 이러한 이력 덕분에 [뷰티 인사이드]는 수려한 영상미로 유명하다.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답십리 고미술상가부터 구경거리들이 쌓여 있는 회현역 지하쇼핑센터, 모두가 분주한 여의도 출근길, 눈이 내리는 도산대로의 언덕까지. 서울의 가장 일상적인 풍경들이 펼쳐진다. 흥미로운 시나리오와 화려한 캐스팅이 겨울의 서울 거리와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소공녀] (2017)

CGV 아트하우스

‘미소’(이솜)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새해가 되자 집세도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올랐지만 일당은 여전히 그대로다.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는 세상에서 미소는 집을 포기한다. 집만 없을 뿐, 일도 사랑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도시 하루살이가 시작된다.

독립영화 [소공녀]는 화려한 서울의 이면을 담아낸다. 멋지고 아름다운 도시지만 어딘가 삭막하며, 사람들은 언제나 조금씩 외롭다. 거대한 도시와 고단한 사람들의 대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미소는 이렇게 서늘한 서울의 겨울을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로 버텨낸다. 집 대신 광화문 어느 와인바에서 위스키를 주문하고, 남자친구와는 서촌 맛집에서 데이트를 하고, 청계천 다리에서 담배 한 모금을 마신다. 이때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빛나는 청계천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이외에도 보신각터, 마로니에 공원, 종로의 골목 구석구석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 겨울, 나는] (2021)

(주)더쿱디스트리뷰션

스물아홉 동갑내기 커플 ‘경학’(권다함)과 ‘혜진’(권소현)은 내일을 위해 뜨겁게 공부하고, 오늘을 위해 열심히 사랑한다. 하지만 ‘혜진’이 먼저 취업을 하게 되자 점점 서로의 ‘내일’과 ‘오늘’이 변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경찰공무원 고시 준비를 하던 ‘경학’이 엄마의 빚을 떠안으며, 공부도 사랑도 위기를 맞게 된다. 경학은 빚을 갚기 위해 잠시 꿈을 멈추고, 배달 라이더에서 공장 노동까지 시작한다. 사랑조차 피곤했던 그 겨울, 이들은 서로에게 얼마나 솔직했을까?

위태롭고 아득한 청춘들의 ‘한겨울, 다른 꿈’을 담은 [그 겨울, 나는]. 낭만 없는 서울의 한겨울을 그대로 보여준다. 경학은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 배달을 하고, 먼지로 뒤덮은 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편의점에서 아무렇게나 끼니를 떼운다. 지친 청춘의 시선에서 서울은 고되고 험난한 도시일 뿐이다. 어쩌면 이 모습이 서울 가장 한가운데에 놓인 풍경이기 때문에 더 잔인하고 서글프다. 그렇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분투하는 청춘의 현실이 시린 겨울 풍경 속에 애틋하게 중첩된다. ‘사랑’을 지켜내는 것도 ‘삶’을 버텨내는 것도 한겨울을 통과하는 일만큼 고단하다는 질문을 던지며,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청춘에게 가슴 뭉클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싱글 인 서울] (2023)

롯데엔터테인먼트

“나한테 딱 맞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싱글이 답이다!”라는 ‘영호'(이동욱)는 혼자 사는 것이 좋은 파워 인플루언서이다. “사실 혼자인 사람은 없잖아요”라는 현진’(임수정)은 유능한 출판사 편집장이지만 연애에서는 늘 헛다리를 짚는다. 두 사람은 싱글 라이프를 담은 에세이 [싱글 인 더 시티] 시리즈의 작가와 편집자로 만난다. 생활 방식도 가치관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책을 두고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낀다. 혼자가 좋지만 연애는 하고 싶은 두 남녀의 싱글 라이프가 시작된다.

이동욱, 임수정 주연의 영화 [싱글 인 서울]의 또 다른 주인공은 서울이다. 매일 보는 서울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아름답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박범수 감독의 의도가 듬뿍 담긴 작품이다. 영화와 잘 어울리는 한강 산책로와 남산이 보이는 카페를 시작으로, 경복궁과 명동성당도 보여준다. 빠르게 변화하면서도 오래된 것이 잘 보존되어 있는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제격이었다. 또한, 영호(이동욱)와 현진(임수정)이 손을 맞잡고 충무로 거리를 걷기도 한다. 가로등을 점멸하고 조명 세팅에 공을 들여 연출해 로맨스 케미와 드라마틱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초겨울의 추위도 잊게 할 만큼 포근한 영상미를 선사하며, 따뜻한 감성과 설렘까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