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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전은 끊임없이 재해석된다고 하였다. 2011년 영화 [만추]는 한국 영화의 클래식이라 불리는 1966년 동명 영화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한국 영화에서만 세 번째 리메이크였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리메이크되며 사랑받아 온 [만추]. 이토록 생명력 강한 작품의 원형은 어떤 모양일까? 공통된 줄거리는 간단하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여자가 모범수의 신분으로 외출을 허락받고, 한정된 시간 동안 한 남자를 만나 인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한다.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원작은 당시 부일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원본 필름의 소실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불후의 명작이다. 이후로 김기영 감독이 1975년에, 김수용 감독이 1982년에, 2011년에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시간이 갈수록 파격적이고,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김태용 감독의 작품은 다양한 연령대를 넘나들며 사랑을 받았다.

세 번째 리메이크인 만큼 김태용 감독은 원작을 아주 다채롭게 변주하였다. 우선 배경은 강릉에서 안개 자욱한 시애틀로 옮겨 서늘하고 먹먹한 늦가을 분위기를 한층 이국적으로 담아냈다. 언어는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를 사용했으며 주인공들은 모두 이방인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애나의 서사와 존재감이 독보적이다. 영화가 탕웨이에게 기대어 간다는 느낌마저 드는데, 이는 감독이 애초에 탕웨이를 두고 캐릭터를 구체화했기 때문일 테다. 주연은 탕웨이와 현빈이 맡았으며, 두 배우의 감수성도 영화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선물 같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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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는 큰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은 여자 애나와 그 여자가 만난 선물 같은 남자, 훈의 이야기다. 수인번호 2537번 애나(탕웨이)는 7년 째 수감 중이며,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의 휴가가 허락된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시애틀 행 버스를 타는데, 쫓기듯 차에 탄 훈(현빈)이 애나에게 차비를 빌린다. 사랑이 필요한 여자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그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훈은 돈을 갚고 찾아가겠다며 억지로 시계를 채워주지만 애나는 무뚝뚝하게 돌아선다. 이후 애나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기대와는 다른 풍경이다. 7년 만에 만난 가족도 시애틀의 거리도, 자기만 빼 놓고 모든 것이 변해 버린 것 같아 낯설기만 하다.

외롭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은 애나가 ‘돌아가 버릴까?’ 하고 발길을 돌린 터미널에서 훈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장난처럼 둘의 하루가 시작된다. 훈은 애나가 시애틀에서 자란 줄도 모르고, 시애틀을 잘 아는 척하며 안내를 한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애나는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의 이름도 몰랐던 애나와 훈은 가까워진다. 호기심뿐이던 훈의 눈빛은 점차 진지해지고, 표정 없던 애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던 중, 누군가 훈을 찾아 오고 애나가 돌아가야 할 시간도 다가온다.

국적도, 미국에 온 이유도, 살아 온 배경까지. 애나와 훈은 모든 것이 다르다. 애나는 훈에게 무표정하고 반응 없는 중국 여자, 애나에게 훈은 귀찮게 말을 거는 실없는 한국 남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어를 못 알아들으면서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훈 덕분에 애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고 털어낼 용기를 낸다. 훈과의 하루로 인해 인생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 것만 같다. 이렇게 영화는 단 3일의 짧은 만남, 그러나 평생 잊을 수 없을 사랑을 그린다. 찰나의 기억이 평생 이어질 수도 있음을, 하루에 불과했더라도 그 사랑을 만나기 전과 후,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두 이방인, 하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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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와 훈은 낯선 미국 땅에 놓여진 이방인들이다. 애나는 미국에 이민을 온 중국인이고 훈은 미국에 식당을 열기 위해 갔지만 전혀 다른 직업을 갖게 된 한국인이다. 영화 속 자욱한 안개는 이들의 아득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신 설명한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두 이방인의 마음에도 안개가 자욱하지 않을 리 없다. 원작이 60~80년대 한국의 가을이 가진 쓸쓸함을 살리기 위해 낙엽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김태용 감독은 그것을 안개로 변주한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마음과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가는 로맨틱한 분위기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공개 당시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이유는 ‘스토리를 배제한 고도의 묘사를 시도한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 김태용 감독은 시적 감흥으로 가득한 원형의 중점을 잘 살려냈다.

애나와 훈의 소통 방식 또한 아주 특별하다. 가장 진실된 속마음을 괜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인 여자 애나와 한국인 남자 훈은 대부분 영어로 소통하는데 이따금 다른 연인의 입을 빌려 연기를 하기도 하고, 남자는 뜻 모를 여자의 중국어를 알아듣는 척하기도 하며, 시계나 포크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동화처럼 연출된 놀이공원의 더빙 장면, ‘하오’와 ‘화이’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대화 장면, 시계를 선물하고 포크를 내던지는 모든 장면은 아주 엉터리지만 정확한 소통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온전하게 전달됐으니 말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첫사랑에게 상처를 받은 애나가 훈의 새로운 언어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된 것이다. 국적과 배경 모두 다르지만, 선물 같은 만남 앞에서 언어는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테다.

감독은 [만추]를 ‘마음을 여는 그 순간’에 대한 영화라고 표현했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있다거나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여는 그 순간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김태용 감독은 [만추]를 통해 그 찰나의 기적을 포착한다. 멜로드라마의 영역을 넘어, 마음의 문을 닫은 개인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더라도 마음을 여는 그 순간이 존재했다면, 그래서 무언가를 견뎌낼 힘이 생겨났다면 그것도 사랑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엔딩으로 갈수록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커다란 감동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