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희도

홍콩 영화계의 거장, 왕가위는 특유의 감성과 독특한 시각적 표현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의 작품은 감동적인 스토리와 아름다운 영상, 깊은 감정을 품은 캐릭터들로 가득 차 있다. 작품에서 왕가위는 그의 특유한 시각적 스타일과 감정의 복잡성을 다층적으로 풀어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홍콩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왕가위의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그 감동과 예술성을 잃지 않고 그의 업적을 증명하며, 홍콩 영화계의 아름다운 상징으로 남아있다.

세기 말,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도 엄청난 붐을 일으키며 당시 국내의 영화, 광고 등에도 왕가위 특유의 카메라 워크, 편집, 조명등 스타일을 모방하며 많은 양의 작품들이 쏟아졌다. 그가 시대를 풍미하며 보여준 많은 작품 중 5개의 영화를 선별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 작품들을 돌아보며 세기 말 향수도 함께 느껴보자.

[열혈남아] (1989)

이미지: (주)디스테이션

대만에서 살고 있던 아화는 홍콩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뒷골목 건달 소화의 집에 며칠 머물게 된다. 어색한 동거가 이어지던 가운데, 소화와 아화는 점점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의형제이자 뒷골목 양아치로 사고만 치고 다니는 창파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매번 다쳐서 돌아오는 소화를 견딜 수 없었던 아화는 그를 떠나게 된다. 홀로 남겨진 소화는 형으로서 창파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랑하는 아화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열혈남아]는 왕가위의 데뷔작이다. 이후에 나오는 왕가위의 영화들에 비해 다소 힘이 들어간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과 음악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고독과 사랑, 우연과 인연에 대한 감각적 표현이 빛을 발한다. 작품 속 감정의 미묘한 변화와 교차는 관객들에게 감동적인 여운을 남겼다. 홍콩의 느와르 영화를 현대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데뷔부터 칸의 주목을 받았다.

[아비정전] (1990)

이미지: (주)디스테이션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둥이 ‘아비’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을 찾아간다. 그는 수리진에게 이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기며 마음을 흔든다. 결국 ‘수리진’은 ‘아비’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결혼하길 원하지만,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비’는 그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 ‘수리진’은 결혼을 거절하는 냉정한 그를 떠난다. 한편 ‘아비’는 댄서인 ‘루루’와 또 다른 사랑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한다. ‘루루’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한편, ‘아비’와의 1분을 잊지 못한 ‘수리진’은 그를 기다린다.

[아비정전]은 왕가위가 두번째로 연출한 장편영화이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표현이 돋보인다.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그려지는 주인공의 내면의 충돌과 성장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당시 홍콩 스타들이 대거 출연을 하여 주목을 받았다. 특히 장국영의 연기는 배역을 집어삼킨 모습일정도다. [아비정전]은 왕가위의 손꼽히는 대표작으로,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이 구축된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경삼림] (1995)

이미지: (주)디스테이션

1994년 홍콩,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술집을 찾은 경찰 223.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술집에 들어온 금발머리의 마약밀매상. “그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고 있는 경찰 663. 편지 속에 담긴 그의 아파트 열쇠를 손에 쥔 단골집 점원 페이. 네 사람이 만들어낸 두 개의 로맨스와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방법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을 옴니버스식으로 나누어 교감을 그린다.

[중경삼림]은 왕가위의 감독적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글로벌 출세작으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한국에서도 이 작품을 기점으로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홍콩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중경삼림]의 덥고 습한 이미지를 떠올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 다수 있으나 온전히 감정을 느끼기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명작이다. 아름다운 시각적 표현과 섬세한 연출은 사랑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다채롭게 표현하며, 세기 말 홍콩의 퇴폐적 젊음, 음악과 영상의 조화로 감정을 한층 깊게 전달한다.

[해피투게더] (1998)

이미지: (주)디스테이션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던 중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 끝에 이별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상처투성이로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 ‘보영’은 무작정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하지만 ‘보영’의 변심이 두려운 ‘아휘’와, ‘아휘’의 구속이 견디기 힘든 ‘보영’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내뱉은 뒤 헤어진다.

[해피투게더]는 왕가위 작품 중에서도 감정의 깊이와 여운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새로운 시작과 변화의 가능성을 탐험하면서, 각 인물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파동을 그린다. 작품 속 아름다운 풍경과 세련된 음악은 감독의 예술적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내며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한때 동성애 소재 때문에 국내에서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지금은 재개봉과 여러 기획전을 통해 꾸준히 관객과 만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화양연화] (2000)

이미지: (주)디스테이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화양연화]는 홍콩 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개봉 후 다양한 매체에서 기록과 영화제 수상을 받았다. 왕가위 특유의 현란한 편집과 화려한 구성 대신, 느리고 정적인 구성을 통해 분위기를 담아낸다. 특히, 왕가위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갈등과 성장을 섬세하게 그려낸 연출은 여전히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며 영화의 제목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이제 이 영화의 제목은 추억과 사랑의 대표적인 명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