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넷플릭스

최근 5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TV 속 순간은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등장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내 기억만큼 친절하고 자상했다. 그날 영만 아저씨는 어릴 적 천진난만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었고, 몸은 다 자라고 마음은 다 자라길 거부한 ‘어른이’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존재였다.

우리에게 종이로 비행기도 로켓도 만들며 상상력을 자극한 아저씨가 있듯, 미국에도 어린이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아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있다. 빌 나이(Bill Nye)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빌 아저씨의 과학 이야기 (Bill Nye the Science Guy)]를 진행하며 쉽고 재미있는 과학 교육에 앞장선 사람이다. 최소한 그 시절 아이들에겐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은 아저씨. 그런 빌 나이가 오랜만에 제대로 판을 깔고 과학을 이야기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미지: 넷플릭스

[세상을 구하는 사나이 빌 나이(Bill Nye Saves the World, 이하 세상을 구하는 사나이]는 현재 시즌 3까지 공개됐다. 매 에피소드마다 과학적 주제를 선정, 탐구하고 정치, 사회, 문화와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하지만 쇼는 나이의 전작 [빌 아저씨의 과학 이야기]가 타깃 시청자부터 다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보와 재미를 동시에 전하려 하지만, 그 대상은 어린이가 아니다. 이미 클 만큼 큰, 그래서 그 근거가 어떠하든 이미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어른이 대상이다.

목적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는 사나이]가 다루는 주제와 그 방향 모두 위험하고 논쟁적이다. 대마초의 효능을 살피며 미국 내에서 연구를 불가능하게 한 법적 문제를 살피고, 백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백신의 필요성을 배격하는 믿음을 비판하고, 다이어트를 탐구하며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다이어트 관련 산업을 함께 살펴본다. 지금도 논쟁 주제인 지구온난화, GMO 식량, 2018년 현재 가장 큰 고민인 게임과 사이버 보안, 오랫동안 인간의 상상력을 시험한 우주 탐사와 시간 여행 등도 다룬다.

솔직히 말해 [세상을 구하는 사나이]의 주제는 흥미롭지만 프로그램 자체의 구성 방식이나 깊이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빌 나이의 원맨쇼를 보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됐는데, 쇼는 그 사실을 완전히 체화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군데군데 보인다. 한정된 시간 안에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 깊이는 마치 넓은 호수에 발가락을 담그는 것만큼이나 얕다. 에피소드를 채우는 4~5개 코너가 모두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특히 전문가 여럿이 출연하는 ‘패널 대담’은 논쟁 대신 각 전문가의 전문 지식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빌 나이’가 원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끌 만큼 진행을 잘 하는 이가 아니란 것도 드러난다.

이미지: 넷플릭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빌 나이와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외면할 수 없는 건, 지금 대중 과학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빌 나이의 프로그램이 잠깐 사라진 시간 동안 세상은 변하고 과학의 위치는 흔들렸다. 지구 온난화는 “인간이 그에 미치는 영향은 증명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부정당하고, 환경 보호 메시지는 개발 논리와 인간의 욕망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수백 년간 연구된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론과 다시 한 번 ‘옳고 그름’을 두고 싸우고 있다. 새로운 발견은 뒷전이고, 이미 검증의 검증을 거친 지식은 배격 받고 있으며 과학을 불신하는 사람이 늘었다.

 [세상을 구하는 사나이]는 (의도하든 그러지 않았든) 2018년 현재는 매우 정치적이다. 논쟁의 영역에 들어온 과학적 사실을 다시금 진실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빌 나이는 지금도 목놓아 외친다. 지구 온난화는 실존하며, 환경은 보호해야 한다. 공존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목표로 사고하고 연구해야 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며 과학적 상상력을 장려해야 한다. [세상을 구하는 사나이]는 욕망 앞에서 욕망 앞에서 그가 끝없이 강조한 ‘과학적 사고’를 잊은 어른에 대한 꾸짖음 같기도, 다른 목적으로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외치는 절규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기대만큼 재미있지 않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가르치던 ‘과학 아저씨’가 초로의 할아버지가 되어 “과학으로 세상을 구하자.”라는 메시지를 전파한다면, 그 말에 한 번은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