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봄동

코로나19 창궐 이후 할리우드는 다시없을 큰 타격에 휘청댔지만 ‘오스카 전초전’에 대한 업계 종사자와 팬들의 관심은 무서운 질병에도 아랑곳없다. 지난 3일(현지시간)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후보 명단이 발표된 후 온라인에서는 각 부문의 후보 선정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이 작품상 유력 후보로 점쳤던 [미나리]의 경우, 전년도의 [페어웰]처럼 미국 영화인데도 언어 규정을 이유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만 올라 미국 시상식의 오랜 고질병인 인종차별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오는 2월 28일(한국 시간 3월 1일 오전 10시) 생중계되는 제78회 골든 글로브의 TV 부문 라인업은 영화 부문 못지않게 탄탄하고 치열해 보인다. 이 중에서도 특히 호평에 비해 상대적으로(어디까지나 한국 기준으로) 덜 회자되고 있는, 숨겨진 다크호스들을 한번 찾아보자.

아이 노 디스 머치 이즈 트루 (I Know This Much Is True)

이미지: HBO

2020년 5~6월 HBO가 선보인 미니시리즈 [아이 노 디스 머치 이즈 트루]는 월리 램의 1998년도 동명 소설을 각색한 심리극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헐크/브루스 배너 역으로 큰 사랑을 받은 마크 러팔로가 극중 정신분열증 환자인 토마스와 그를 정신병원에서 빼내려는 쌍둥이 형제 도미닉을 동시에 열연하며 이번 골든 글로브의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재미있게도 돈 치들 역시 [블랙 먼데이]를 통해 뮤지컬·코미디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상태로, 두 MCU 동창의 동반 수상 여부에도 귀추가 주목된다. [아이 노 디스 머치 이즈 트루]는 영화 [블루 발렌타인]의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이 연출했으며, 멜리사 리오, 줄리엣 루이스, 로지 오도넬, 캐스린 한, 이모젠 푸츠, 아치 판자비, 브루스 그린우드 등 반가운 조연들 덕분에 보는 맛이 더욱 즐거운 작품이기도 하다.

시트 크릭 패밀리 (Schitt’s Creek)

이미지: CBC

2015년 시작해 2020년 시즌 6으로 종영한 [시트 크릭 패밀리]는 유진 레비-댄 레비 부자가 주연 겸 공동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캐나다 CBC 시트콤으로, 매년 에미상,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 등 유수의 시상식을 휩쓸어 왔다.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거리로 나앉게 된 갑부 가족이 유일하게 남은 부동산인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면서 벌어지는 요절복통 이야기로, 탄생 비화도 꽤나 범상치 않다. 댄 레비에 따르면, 그는 리얼리티 쇼를 시청하던 중 “카다시안 가족 같은 부잣집 사람들이 돈을 몽땅 잃은 후에도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란 아이디어가 떠올라 곧장 아버지 유진 레비에게 각본화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한편 [시트 크릭 패밀리]의 로즈 가족 배우들 모두 올해 골든 글로브의 남우/여우 주연상(유진 레비, 캐서린 오하라)과 남우/여우 조연상(댄 레비, 애니 머피) 후보에 올랐는데, 작년 제72회 에미상에 이어 이번 시상식에서도 해당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한다면 또 하나의 대기록이 쓰여지는 셈이다.

베터 콜 사울 (Better Call Saul)

이미지: 넷플릭스

장수 시리즈가 되어서인지 예전에 비해 눈길이 덜 쏟아지는 것 같지만, 이 시리즈의 재미와 작품성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다. [브레이킹 배드]의 인기 감초 사울 굿맨의 과거를 다룬 스핀오프 [베터 콜 사울]은 지난해 시즌 5를 통해 본격적으로 범죄의 길에 들어선 사울의 타락을 씁쓸하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었다. 매 시즌 1화의 오프닝에 본편인 [브레이킹 배드] 이후 새 신분으로 은둔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선택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란 교훈을 끊임없이 일깨우기도 한다. 2021년 대망의 마지막 여섯 번째 시즌이 공개되는 [베터 콜 사울]이 주연 배우 밥 오덴커크를 통해 골든 글로브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추가한다면 훨씬 기분 좋게 피날레의 스타트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스몰 액스 (Small Axe)

이미지: BBC

5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국 BBC의 앤솔로지 시리즈 [스몰 액스]는 제78회 골든 글로브의 작품상(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 및 남우조연상(존 보예가) 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헝거], [셰임], [노예 12년], [위도우즈] 등 굵직한 작품을 연출하며 인간의 다방면을 고찰해 온 스티브 맥퀸 감독은 1960년대~1980년대를 관통하는 인종차별 문제와 그에 맞선 투쟁을 세밀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Small Axe’란 제목은 밥 말리가 1973년 발매한 동명의 노래에 가사로 삽입된 자메이카 속담 “If you are a big tree, we are a small axe”에서 따온 것으로, 혐오와 차별을 앞세운 극우 세력이 부상하면서 세계 곳곳에 여전히 상흔이 남아 있는 지금, 작품의 존재 의의를 직관적으로 상기시킨다. [스몰 액스]는 레티티아 라이트, 존 보예가, 숀 팍스, 로첸다 샌달, 잭 로든 등 각양각색 연기로 완성되었으며 앞서 2020년 제46회 LA비평가협회상 작품상과 제86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촬영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라미 (Ramy)

이미지: hulu

2019년부터 방영된 훌루 시트콤 [라미]는 주연 겸 크리에이터인 이집트계 미국인 코미디언 라미 유세프의 자전적 이야기다. 사실상 유세프 본인인 주인공 라미 하산은 미국으로 이주한 무슬림 부모에게서 태어나 뉴저지에 살며, 가족과 친구들 틈에서 무슬림으로서의 종교적 자아와 밀레니얼 세대의 사고방식을 놓고 시시콜콜 갈등을 겪는다. 오랫동안 대중 매체를 통해 미국 사회의 ‘악의 축’처럼 묘사된 현지 무슬림 사회를 실제 무슬림의 시각에서 솔직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시즌 2에서는 오스카를 수상한 최초의 무슬림 배우인 마허샬라 알리가 특별 출연하면서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첫 시즌으로 제77회 골든 글로브에서 뮤지컬·코미디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꿰찼던 [라미]는 이번 골든 글로브에서도 동일 부문 후보로 다시 지명되면서 기대를 모은다. 작년 7월 제작이 확정된 시즌 3의 촬영 및 방영 시기는 아직 미지수이나, 라미 유세프가 2년 연속 트로피를 차지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새 시즌의 활력으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에디터 봄동: 책, 영화, TV, 음악 속 환상에 푹 빠져 사는 몽상가. 생각을 표현할 때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내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