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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션 오닐 (Sean O’Neil)
translated by 겨울달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보헤미안 랩소디]를 개봉일에 보러 갔다. 평론가 친구들이 “그저 그래!”라고 외치는 소리가 “갈릴레오!” 합창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울리던 때였다. 친구들은 그냥 볼 만한 영화라고 했다. 구제불능 수준까지 아니더라도 탁월하지 않으며, 뛰어난 콘서트 장면과 프레디 머큐리를 맡은 라미 말렉의 연기가 굉장히 뻔한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다고 평가했다. (그것만으로도 성공과 추락, 구원을 다루는 옛날 록 전기영화를 재탕한 수준 이상이라고 본다. 말렉이 실제로 아카데미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말렉이 영화에서 큰 틀니를 끼고 연기를 제대로 해낸 것처럼 영화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그저 그런 괜찮음’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퀸은 대형 공연을 뒤흔들 만한 위대한 밴드이지만, 영화는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 참석자를 감탄하게 하는 커버 밴드 수준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갔다. 퀸의 엄청난 팬은 아니다. 퀸을 좋아하지만, 내 지식이란 라디오에 나온 히트곡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겠다. (그러니 대략 150곡쯤 될 것이다.) 송라이터이자 퍼포머로서 프레디 머큐리가 가진 엄청나면서도 기이한 재능은 잘 알고 있다. 영화에서 말렉의 머큐리가 말했듯 “방구석에 홀로 있는” 다른 부적응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상징적 존재로 오랫동안 기억된 것도 안다. 솔직히 말해 내게 그런 사람은 루 리드, 데이빗 보위, 커트 코베인이었고, 퀸이나 머큐리에 내 감정을 쏟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보헤미안 머큐리] 개봉 초반 쏟아진 비판이나 영화가 실제 역사를 생략하거나 잘못 그린 점, 시간 흐름이 명확하지 않은 점, PG-13 등급을 맞추려고 머큐리의 사생활을 건전하게 그린 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저 그런 음악 전기 영화”는 “[좋은 친구들]을 대놓고 베낀 영화”와 “글을 못 쓰고 있는 작가가 주인공인 영화”와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세부 장르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야심과 본질적으로 심각하게 손상된 결점이 충돌한 결과물, 알랑대는 듯 대상을 숭배하면서도 엄청나게 모욕하는 결과가 된 영화를 사랑한다. 10년 전 [앙코르]가 성공적으로 망쳐놓은 포맷, 즉 누군가의 삶을 다 안다고 생각하냐며 관객을 놀리듯 자극하고서 너무나 예측 가능하게 전개되는 영화를 보는 게 너무 좋다. 이유는 모르겠다. 질리지 않는다.

노토리어스 Notorious
이미지: Fox Searchlight Pictures

내 사고 자체가 이런 식으로 조정됐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그저 그런 수준”은 음악가 전기 영화의 기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레이]나 [앙코르]가 그렇다. (물론 전기 영화 공식을 대중화해서 나중엔 모두가 따라 하거나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시드와 낸시],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나는 이 두 영화를 음악 전기 영화보다는 장면과 중요한 철학, 정말 엉망인 사람 몇 명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나 [벨벳 골드마인]도 해당된다. (두 영화는 전기영화보단 열기에 들뜬 꿈 같다.) 나는 이 영화들 모두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하지만 비기 스몰의 삶을 형편없이 그린 C급 영화 [노토리어스]가 TV에 나오면 채널 돌리는 걸 멈추고 볼 만큼 좋아한다. 1990년대 말 VH1이 대량으로 찍어낸 D급 전기 영화 시리즈 “무비스 댓 락”도 좋아한다. (특히 [투 리짓: MC 해머 이야기]에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 이 영화에선 로매니 말코가 “Pumps and a Bump” 뮤직비디오의 예상치 못한 비애를 드러낸다.)

커서는 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뜨거운 팬심 때문에 [열정의 로큰롤]을 끊임없이 보고 또 봤는데, 데니스 퀘이드가 연기한 제리 리 루이스는 흥분해 미친 듯한 대피 덕 같았다. 나의 10대 시절 침실에는 올리버 스톤의 [도어스] 포스터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영화를 난 아직도 사랑하며, 그 영화가 누군가 고압적으로 스스로를 신화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나 나 같은 도어스 팬들의 천박한 허세를 정확하게 포착한 방식은 여전히 마음을 다해 옹호한다. [보헤미안 랩소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들은 위키피디아를 훑어본 것보다 영화 주인공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 매력은 부인할 수도 없으며, 이 글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일부분은 쉽게 설명 가능하다. 이 영화들은 아주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한다. 주인공에 걸맞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흥미롭다. 인기 배우가 록 스타 흉내를 내려다 결국 둘 다 부끄럽게 만드는 걸 볼 때면 씁쓸한 조소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생각까지 다다르게 한 다양한 우위의 위계질서까지는 파고들지 않겠다). 특별히 자랑스럽지 않지만, 나의 불안하고 작은 본능의 뇌는 이런 걸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인물이 다른 유명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보는 것이나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진짜처럼 느끼기엔 너무나 두려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있다. 아무리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첫 만남” 장면을 재현하려 해도 왁스 박물관 동상처럼 가짜 티가 나지 않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 시도는 멈추지 않는 듯하다.) 그저 그런 음악 전기 영화는 이런 순간엔 잔재주에 기대려 한다. 유명한 록스타가 또 다른 역사적 인물과 악수를 하며 이름 전체를 소리내어 부르는 찰나의 순간으로 한 신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평론가들이 던지길 좋아하는 아주 희미한 칭찬의 말을 경험하는 순수한 기쁨도 있다. 바로 “볼만하다”는 표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기 영화 중 “볼만한 것” 이상인 게 있나? 하지만 어릴 적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몰아보는 것처럼 그런 걸 보는 것 자체가 기쁘게도 위로가 된다. 아! 비기가 투팍을 만나는 그 사건! 이야기 전개 방식이 완전 마음에 들어! (라이언 머피에게 따로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매 에피소드마다 뮤지션의 생애 중 제일 중요하고 자극적인 순간만 다루는 앤솔로지 시리즈를 꼭 보고 싶다.)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내가 그저 그런 전기 영화에 끌리는 건 개인적 경험을 통해 대부분의 록 밴드는 사실 정말 지루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25년 동안 뮤지션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인터뷰하고, 같이 놀고, 심지어 어떤 밴드와는 공연, 녹음, 투어도 함께 했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하는데, 이들 중 95%는 전기 영화 주인공으로는 최악이다. 뮤지션의 일은 기다림이 거의 대부분일 만큼 단조롭다. 공연 기회를 얻길 기다리고, 사운드 체크를 기다리고, 공연할 때까지 기다리고, 실제 돈을 벌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롤링 스톤즈나 비틀스 등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밴드의 다큐멘터리조차도 누군가가 탬버린을 내려놓는 걸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장면이 대부분인데, 장면 속 사람들 얼굴은 마치 사무직 일을 동경하는 듯한 표정이다. 물론 무대 위의 짜릿함이나 무대 뒤의 화려함도 존재한다. 마약 문제, 밴드 멤버 간 갈등,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이 실제 내러티브에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녹음, 재녹음과 담배 피우는 휴식 시간, 그리고 점심을 뭘 먹을지 논쟁하는 것뿐이다.

그저 그런 음악 전기 영화는 지루한 요소를 다 제거하고 감당할 만한 멜로드라마 크기로 줄어들고, 그렇게 환상을 유지한다. 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와 대부분의 보통 팬도 즐길 만큼 [셰익스피어 인 러브] 수준으로 왜곡된 스토리와 함께 환상적인 립싱크로 채운 히트곡 패키지를 선사한다. (물론 [웨인스 월드]를 통해서만 퀸을 접했다면, [보헤미안 랩소디]가 다 커버해 줄 것이다.) 그래도 칭찬을 하자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현실적 창작 과정을 다른 영화보다 잘 보여준다. 오페라 가성을 계속해서 덮어씌우며 녹음하는 것이나, 존 디콘(조 마젤로)이 “Another One Bites the Dust”의 거들먹거리는 베이스라인을 처음 연주할 때 옆에서 싸우고 있던 멤버들이 부인할 수 없는 마력에 잠깐 동안 휴전하는 장면도 있다. 실제로 그렇진 않았겠지만, 그 장면은 너무 달라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퀸 멤버들이 어떻게 음악 앞에서 기적적으로 힘을 합치는지를 직설적인 말보다 더욱 우아하고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린 영화에서 존 디콘이 아니라 그의 베이스 파트에 대해서만 알게 되고, 퀸의 다른 멤버들이 머큐리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만 알 수 있다. 영화의 주크박스 뮤지컬 스타일 시퀀스나 머큐리가 성 정체성과 끝없는 외로움에 힘들어한다는 틀에 박힌 내러티브에 포함되지 않는 건 알 수 없다. “중간에 생기는 시간이야.” 영화에서 머큐리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정말 못 참겠어.” 영화도 그에 동의하듯 큰 사건들 사이의 일은 퀸의 히트곡 모음 카세트테이프를 빨리 감듯 지나간다. 중요한 순간이 아닌 것들을 경시하는 태도 때문에 영화 자체는 속은 텅 빈 그저 그런 영화가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퀸이나 프레디 머큐리에 당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왔다면 영화의 내러티브가 붕괴되고 합쳐지는 방식에 분개할 것이다. 몇몇 순간을 완전히 잘못 재현했거나 머큐리의 생애 마지막 5년의 아름다운 순간을 무시한 것에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모든 전기영화가 어지럽고 복잡한 삶 속에서 정돈된 내러티브를 만드는 걸 힘들어한다. 모든 아티스트의 전기 영화는 대부분 내면적이면서 지루한 창작 과정을 스크린에서는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만든다. 그중에서도 뮤지션의 전기영화는 이런 작업이 가장 심하게 이루어진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전설적이면서 많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 존재로 뮤지션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경계한 채 영화를 보러 들어간다. 그들과 그들의 음악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 마음속에서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영화가 이를 전달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 확신한다. 배우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든 절대로 ‘그들’은 되지 못한다. 누가 그럴 수 있겠나? 말렉은 정말 훌륭했지만, 그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니다. 노래도 본인이 부른 게 아니다!

이런 선입관 속에서, 그저 그런 전기 영화는 당신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어떤 면에선 그에 안심하기도 한다. 영화가 당신에게 값싼 흥분이나 싸구려 웃음을 줄 수 있지만, 주인공이 특별한 존재이고 언제나 그럴 것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와 실제 사이, 진실은 모호하게 남고 신화는 언제나 지속되는 공간을 만든다. 여러분이 나와 같다면, 그런 점이 마음에 들 것이다.

This article originally appeared on Vulture: In Defense of the Mediocre Music Bio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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