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날이 오면 영화팬들의 시선은 맛집 천국 전주로 쏠린다. 매년 4월말 혹은 5월 초 독립/대안 영화의 화려하고도 푸짐한 만찬인 전주국제영화제(JIFF)가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는5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간, 전주 영화의거리를 비롯한 전주 시내 일대에서 개최된다.

특히 JIFF는 남다른 시선과 완성도를 가진 한국독립영화를 많이 발굴하는 영화제로 유명하다. 여기서 공개되어 평단과 영화팬들에게 지지를 얻고, 지금은 한국영화의 거장이 된 작가들도 많다. 또한 재능 있는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데뷔작 혹은 필모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품들이 전주에서 관객들과 처음 만나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올해는 또 어떤 영화들이 나와서 관객들에게 배우맛집 ‘JIFF’의 명성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전주가 발견한 배우들을 수상작 중심으로 살펴본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이정현

이미지: CGV 아트하우스

2015년 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정현의 재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개봉한 [댓글부대] 안국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열심히, 착하게 살아온 한 주인공이 사회적 풍파를 겪으면서 흑화 되는 과정을 블랙코미디 톤으로 그렸다. 코믹한 리듬이 강하지만, 그 안에 깃든 여러 부조리에 대한 예리한 성찰과 강렬한 비판 의식은 상당히 매섭다.

이정현은 극중 수남으로 등장해 이야기를 이끈다. 손재주가 좋아 여러 일을 하던 중 남편을 만나고, 그저 내 집 마련의 꿈 하나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남편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 부부의 꿈은 산산이 무너진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부부에게 주위 사람들은 여러 손길을 내밀지만, 양의 탈을 쓴 늑대의 고약한 계략일 뿐이다. 이에 수남은 정신을 붙잡고 더욱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절망의 늪은 더욱 커져간다.

극중 이정현은 영화 제목 그대로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삶의 궁지에 몰인 수남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너무 큰 절망 앞에서 멘탈이 무너져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잘 구별하지 못하지만, 이 또한 이정현 특유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괴리감을 자아내며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부각한다. 이 같은 열연 덕분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판타지이자 사회풍자극으로 다가온다. 20년 연기 내공을 가진 이정현이라는 배우에게 아직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무궁무진한 저력이 있음을 깨닫는 것과 함께 말이다. 전주에서 첫 공개 후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해 한국 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엄청난 연기 내공을 보여준 이정현은 36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십개월의 미래 – 최성은

이미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2020년 코로나로 모든 영화제와 산업이 멈출 때도 전주의 숨겨진 보석 발굴은 계속되었다. 오프라인 상영 없이 온라인으로 진행된 2020년 21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에 출품된 [십개월의 미래](당시 출품명은 [십개월])은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스물 아홉의 컴퓨터 게임 개발자 ‘미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출산까지 과정을 그린 이야기로, 한예종 출신 남궁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자신의 미래와 출산의 두려움을 가진 주인공의 여러 고민을 유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내 많은 공감을 빚어냈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미래 역을 맡은 최성은 배우의 열연이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당황하는 모습부터, 이로 인한 여러가지 고민과 두려움을 빼어난 연기로 보여준다. 이야기 특성상 코믹 드라마로 출발한 영화는 후반부에 꽤 오싹한 호러의 느낌도 있는데, 이때마다 변화하는 미래의 감정을 최성은이 실감나게 표현한다. 신예 배우라고 믿기지 않을 노련한 내공을 보여준 최성은 배우는 [십개월의 미래]를 발판으로 다양한 작품에서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다. 드라마 [괴물]을 비롯해, [안나라수마나라], [젠틀맨] 그리고 최근 [로기완]까지, 최성은의 활약상은 계속 진행 중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 – 공승연

이미지: 한국영화아카데미

2021년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혼자 사는 사람들]은 1인 가족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혼자가 편한 진아의 일상을 잔잔하게 돌아보는 작품이다. 상담원인 진아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혼자가 편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퇴근길에 맨날 말을 걸던 옆집 남자가 혼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일상을 돌아본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진아는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일까? 영화의 질문에 관객은 각자의 상황을 대입하며 진아의 고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공승연은 극중 진아 역을 맡아서 조용하면서도 의미 있게 극 전체를 조율한다. 혼자가 편하고, 타인과 소통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절제된 대사와 표정으로 묘사한다. 후반부 진아가 왜 이런 삶을 살아가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캐릭터의 내면을 심도 깊게 투영하는 부분도 훌륭하다. 1인 가구의 일상 속에 삶의 의미를 담담하게 비춰내는 공승연의 존재감은 영화의 조용한 분위기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순간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공승연은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을 수상했고, 청룡영화제 신인여우상의 트로피도 받으며 배우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다.

낫아웃 – 정재광

이미지: 키즈리턴 이안필름

야구 이야기인 줄 알고 보러 갔다가 인생의 쓴 맛을 깨닫고 온 영화가 있다.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낫아웃]이 그런 작품이다. 아웃이지만 아웃이 아닌, 이 작품의 제목은 그 의미만큼이나 주인공의 가혹한 성장담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고교 야구 입시생 광호는 전국대회 결승전의 수훈 선수로 꼽히면서 밝은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프로야구 드래프트에 탈락하면서 자신이 꿈꿨던 찬란한 미래는 그야말로 아웃. 세상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광호에게 가짜 휘발유를 파는 친구 민철은 위험한 제안을 하고,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낫아웃]은 마치 야구판 [파수꾼] 같은 느낌을 가진다. 불안한 미래 속에 방황하는 고등학생 주인공,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겉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 모습들이 비슷하다. 다수의 독립영화와 드라마에서 얼굴을 알린 정재광이 고교 야구 입시생 광호 역을 맡아서 영화를 이끌어간다. 부푼 희망을 안고 미래를 꿈꾸는 모습부터, 참혹한 결과 뒤 일탈하는 광호의 복잡한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결과 [혼자 사는 사람들]의 공승연과 함께 그해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과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동시에 수상한다. 최근 개봉한 [화란]에서도 실질적인 빌런인 승무 역으로 출연해 묵직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