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빈상자

 

 

3월 4일 오후 5시,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이 가까워지고 있다. 올해로 90번째를 맞이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영화 중심의 시상식임에도 미국 영화계가 전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경제적·수적 비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다. 매년 생방송으로 시상식을 지켜보는 시청자도 미국에서만 3~4천만 명, 전 세계적으로 몇억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ABC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만큼 수상 결과에 대한 이견과 논란도 매년 반복되기 마련인데, 그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수상 결과에 대한 논란은 역시 아카데미상의 여러 시상 부분 중에서도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작품상(Best Picture)을 받은 영화를 중심으로 커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영화들 가운데, 당시에는 물론 지금 더 명확하게 아카데미의 실수로 판명 나고 있는 21세기의 영화들, 그리고 대신 받았어야 했을 영화들을 돌아보았다.

 

 

 

1. 뷰티풀 마인드 A Beautiful Mind 2001

 

이미지: 드림웍스픽쳐스

 

2000년대 초,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배우 러셀 크로우가 마초적인 근육질 글래디에이터에서 1년여 만에 눈에 초점을 잃고 힘이 쫙 빠진 공부벌레가 되어 돌아왔다. [글래디에이터]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러셀 크로우의 연패 기적은 없었지만, 그는 연기 변신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조연상까지 4개 주요 부문을 휩쓸어간 [뷰티풀 마인드]의 성공의 영광은 특히 주인공 러셀 크로우에게 집중되는 듯했다.

하지만 [뷰티풀 마인드]에서도 반복되는 의도와 기능이 뚜렷한 연출과 편집, 음악과 밀착한 감동적인 장면,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는 인간승리, 이를 이끈 아내의 헌신과 가족애, 여기에 반전까지 더해진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이후의 미래를 지향점으로 가리키고 있다기보다 이전의 과거에 질척대고 있는 느낌이다. 이로써, 21세기의 시작을 알리며 2001년 개봉작을 대상으로 했던 2002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은 아카데미가 여전히 감동과 휴머니즘을 선호하는 19세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미지: USA필름

 

그해 작품상은 당연히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고스포드 파크]의 몫이어야만 했다. [고스포드 파크]는 1930년대 사냥을 위해 고스포드 파크 저택에 모여들었다가 발생한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귀족과 하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군상을 거침없이 해부해서 펼쳐 보인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를 닮은 플롯 위에 수많은 명배우들을 캐스팅해, 여러 이야기의 줄기를 동시에 뽑아내고 또 엮어버리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장기가 더해진다. 무엇보다 꾸준히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도 독립적인 영역을 지키고 풍부하게 해온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작품을 선택했다면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명예를 높일 수 있던 기회였는데 말이다.

 

 

 

2.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2008

 

이미지: 미디어소프트, 거원시네마㈜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인도 청년의 이야기가 (자주 미국인들의 조롱감이 되는) 인도 영어와 힌디어로 풀어지는 ‘발리우드 삘’ 영화가 미국에서 성공한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상업적으로 대박을 쳤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상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분을 포함한 8개의 상을 거두면서, 말 그대로 난리가 난 인도는 물론 미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성공 배경에는 우선 영국 감독 대니 보일이 발리우드의 재료들을 서구인들의 입맛에 맞게 잘 다듬은 공이 크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슬럼가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 크게 성공하는 이야기가 미국인들의 오랜 판타지인 아메리칸드림을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영국 게임쇼의 인도판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가 일찍이 미국판으로도 제작·방영되어 크게 성공했고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꼭 이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몇 번 출연하고 큰 상금을 받아가는 게임쇼는 수두룩하다.

 

 

이미지: ㈜누리픽쳐스

 

하지만 발리우드 삘 영화의 미국에서 고무적인 성공에도,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쏙 빼고 나면 이 영화가 작품성으로도 평가받을만한가 고민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서구 입맛과 인도 문화가 잘 뒤섞인 모범적인 사례라고 한다면, 미라 네어의 [몬순 웨딩]이 더 거론되어야 하고, 당시 아카데미 작품상이라고 한다면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가 더 큰 자격이 있었다.

 

 

 

3. 시카고 Chicago 2002

 

이미지: 씨네그루㈜키다리이엔티

 

[물랑 루즈]가 2002년 3월에 열린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에 후보에 올랐을 때, 이는 고국 미국에서조차 잊혀 가던 뮤지컬 장르가 10년 만에 이룬 수확이었다. 10년 전 후보작도 실사영화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미녀와 야수]였다. 하지만 결국 작품상 수상에는 실패한 [물랑 루즈]는 상업적 성공으로 뮤지컬 영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모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그 혜택은 다음 해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카고]가 누렸다.

그해 아카데미에서 [시카고]가 6개 부문을 수상하는 모습은, [파리의 미국인]이 6개 부분을 수상한 1951년이나 혹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10개 부문을 휩쓸어간 1961년 등 뮤지컬 장르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다.

 

 

이미지: 조이앤컨텐츠그룹

 

미국인들이 춤과 노래에 취해 과거로 회귀하는 동안, 다른 좋은 영화들이 외면을 받아야 했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다른 작품상 후보작이었던 [피아니스트]가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뮤지컬 사랑에도, 유대인들의 자기연민에도 지친 마음으로는, (작품상 후보작은 아니었지만) 감독상 후보작이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나 각본상 후보작이었던 알폰소 쿠아론의 [이 투 마마]에 강제로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4. 아르고 Argo 2012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에서 나름 성공적인 감독으로 변신한 벤 애플렉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쥐게 된다. 영화는 1979년 이란 테헤란에서 50여 명의 미국 대사관 근무자들이 인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가까스로 이를 피한 미국인 6명을 탈출시켰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플롯에 대해 ‘가해자’로 묘사된 이란이 ‘지극히 정치적인 영화’라며 발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뉴질랜드조차 [아르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당시 뉴질랜드 수상까지 나서서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다.

문제는 역사적인 사실의 왜곡이었다. [아르고]에서 6명의 피난처를 찾던 미국은 테헤란의 뉴질랜드 대사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뉴질랜드는 물론 영국 대사관도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을 도왔다. 특히 가장 큰 역할을 한 곳은 캐나다 대사관이었다. 사실, ‘캐나다 케이퍼(Canadian Caper)라고 불리는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캐나다 대사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도 “90%는 캐나다가 다 했다”며 인정했을 정도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하지만 [아르고]는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각하였고, 결국 미국 중심의 영웅스토리로 만들어버렸다. 찔리는 마음이 있었을까, 벤 애플렉은 아카데미상을 받으면서 수상소감으로 “캐나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라고 외쳤지만, 그것으로 논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뉴질랜드의 항의에 대해 “뉴질랜드를 너무 사랑하지만,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하는 그의 변명처럼 미국을 더 사랑하는 그에겐 국뽕의 유혹이 너무나도 거셌나보다. 여러 모로 당시 작품상은 [라이프 오브 파이]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5. 크래쉬 Crash 2004

 

이미지: ㈜스튜디오2.0

 

캐나다인 감독 폴 해기스가 [크래쉬]의 극본을 완성한 시기는 9/11테러 직후였다. 9/11테러로 아랍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해지면서 미국의 해묵은 갈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크래쉬]는 (좋게 말하자면) 그런 갈등을 치유하고 싶은 영화였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랍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이 등장해서 그동안 외면하고만 싶었던 갈등과 욕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이를 위해 산드라 블록, 맷 딜런, 돈 치들 등 10여 명의 주인공급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서 동시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앙상블 캐스트로 다양한 사회계층과 인종을 대표했다.

하지만 폴 해기스 감독이 좌시했던 것은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보다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법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크래쉬]가 제시한 해결책은 순진하고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무지하고 일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인종차별의 해법을 모색하던 영화는 오히려 인종차별을 배설물처럼 쏟아내고 뒤처리를 못하기까지 한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에 대한 악의적인 묘사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악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흑인 여성(탠디 뉴튼)을 성추행을 했던 백인 경찰(맷 딜런)이 나중에 교통사고에서 같은 여성을 구조하면서 갈등을 매듭지는 방식이었다. 미투운동이 거센 지금이라면 더 큰 논란을 불러들였을 이 영화는, 당시 기준에서도 그 이후로도 수상 자격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최근에는 감독 스스로 아카데미 작품상 자격이 없었음을 시인하고 말았다.

 

 

이미지: ㈜영화사 백두대간

 

[크래쉬]는 영화 자체로도 자격 논란이 일었지만, 당시 [크래쉬]의 작품상 경쟁작을 알고 나면 더욱더 납득할 수 없게 된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다른 후보작인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품성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들은 동성애를 그린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억지화합감동휴먼드라마’인 [크래쉬]에 더 끌렸던 듯하다. 2015년 할리우드 리포터가 아카데미 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위원들은 그때 [브로크백 마운틴]이 받았어야 됐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