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빈상자

 

 

4월 25일에 개봉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의 기세가 무섭다. 국내에서 12일 만에 관객수 800만 명을 넘어서더니, 전 세계에서도 11일 만에 10억 달러 누적수익을 올렸다. 모두 역대 최단기간 기록이다. 상영 전 입장료 인상, 번역과 스크린 독과점 논란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에 신이 난 듯 극장은 아침 7시부터 새벽 2~3시까지 거의 24시간을 운영하며 [인피니티 워] 전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전체 상영관 중에서 평균 75%는 [인피니티 워]가 차지했다. 이는 ‘어벤져스’의 고향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4월 27일에 미 전국의 상영관 중 78%가 넘는 4,470개 상영관을 점령하면서 [슈퍼배드 3]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개봉관 수 기록을 세웠다.

[인피니티 워] 덕분에 마치 국내에서나 미국에서나 극장은 최고의 나날들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속내는 반대에 가깝다. 미국은 1997년 이후로 극장 관객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탓에 블록버스터 의존도가 심해지고 있다. 이는 중소 예산의 영화를 많이 만들기보다 한 해 몇 편의 블록버스터에 집중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략과도 괘를 같이 한다. 이미 한국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할리우드의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 극장과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블록버스터의 계절, 여름

 

[인피니티 워]는 올해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왔다. 바로 4월 개봉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 최고의 극장 성수기는 학생들이 긴 여름방학을 누리는 5월부터 7월까지다. 이때 그 해 최고 기대작과 블록버스터가 집중된다. 자연스럽게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도 이 기간에 개봉을 한다. 1978년부터 2018년까지 40년 동안 128편의 슈퍼히어로 영화 중 절반 이상 개봉일이 이 3개월에 집중되었다.

 

 

이미지: deadline

 

1978년부터 1999년까지는 주로 6월에 개봉했던 대작 개봉일은 2000년 이후로는 방학이 시작하는 5월로 앞당겨졌다. 특히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2008년 이후로 이 법칙을 충실히 따랐다. [아이언맨], [아이언맨 2], [아이언맨 3], [토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어벤져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모두 5월 첫째 주에 개봉했다.

[인피니티 워]도 처음에는 5월 4일을 개봉일로 잡았다. 그러다 개봉을 불과 2개월을 앞두고 일주일을 앞당겨 4월 27일로 변경하면서 많은 사람들(특히 4월에 개봉하는 영화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2018년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던 [인피니티 워]를 전통적으로 비수기로 알려진 4월에 개봉하는 이유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다.

 

 

 

4월로 여름 시즌을 앞당긴 디즈니

 

5월에는 디즈니가 야심 차게 시작하는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워즈]의 스핀오프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가 개봉한다. 개봉일은 [인피니티 워]와 한 달 차이가 나는 5월 25일이다. 그리고 6월 15일에는 [인크레더블 2]가, 7월 6일에는 [앤트맨과 와스프]가 줄줄이 개봉한다. (*개봉일은 모두 북미 기준) 디즈니로서는 각 영화 사이에 여유를 두고 싶었을 것이다. 여유가 생기면 홍보역량과 홍보기간, 그리고 관객을 배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특히 4월 말부터 이른 여름 성수기를 길게 누릴 수 있게 된 [인피니티 워]가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인피니티 워]가 과감하게 성수기를 4월로 앞당긴 것에는 디즈니의 자신감도 작용했다. 2017년에 최대 수익을 올린 영화 8편 중에 4편은 디즈니 영화였다. 그리고 [어벤져스] 시리즈는 MCU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고 가장 큰 수익을 디즈니에 벌어주고 있다. [어벤져스]가 움직이면 관객들도 따라서 같이 움직일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인피니티 워] 개봉 성적은 디즈니의 그런 자신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물론 올여름 극장 성수기를 노리고 있는 스튜디오가 디즈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벤져스’에 끼지 못한 또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인 이십세기폭스의 [데드풀 2]가 5월 18일, 워너브라더스의 [오션스 8]가 6월 8일,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이 6월 22일, 그리고 파라마운트의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 7월 27일에 각각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작을 살펴보면 유난히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 원작이 있다. [어벤져스]와 [앤트맨과 와스프]는 디즈니가, 그리고 [데드풀2]는 이십세기폭스가 영화 저작권을 가진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다. [한 솔로]는 1977년 시작한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스핀오프이고, [미션 임파서블]은 1966년 시작한 TV 버전은 차지하고서라도 톰 크루즈가 34살이던 1996년에 시작해 이제 어느덧 56살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6번째 영화다. [쥬라기 월드] 역시 1993년 시작된 [쥬라기 공원]의 5번째, [오션스 8]도 1960년 영화에 이어 2001년 성공적인 리부트로 돌아온 [오션스 일레븐]의 스핀오프이자 5번째 영화다.

 

 

 

1968년과는 전혀 다른 지형

 

이와 같이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최근 들어 급격히 창의력을 잃어가고 있다. 영화평론가 케네스 튜런은 최근 LA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1968년의 흥행작과 최근의 흥행작을 비교했다.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40년 전 박스오피스는 작품성과 장르면에서 관객 선택의 폭이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미지: MGM

 

우선, 1968년에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가 있다. 또 다른 SF 명작으로는 [혹성탈출], 그리고 서부 영화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집행자]가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장르인 뮤지컬 [올리버]와 함께 [화니 걸]도 있다. 극장에 함께 나온 가족들은 [러브 버그]를 선택했고, 많은 연인들과 여성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열광했다. [러브 버그]의 귀여운 이야기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에 심술이 난다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악마의 씨]를 보면 그만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영화가 모두 흥행작이었으며, 관객들이 골고루 분포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최근 1년간 10대 흥행작 중 7편은 슈퍼히어로나 스타워즈 영화다. 1968년이 유난히 특별한 한 해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1960년대와 2010년대의 영화 선택의 폭과 관객의 취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이미지: 소니픽쳐스

 

배우이자 감독이기도 한 조디 포스터는 최근 라디오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슈퍼히어로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아 주목을 받았다.

“극장에 가는 것이 놀이공원에 가는 것처럼 됐어요. 스튜디오들이 대중과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질 나쁜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셰일가스 시추와 같아요. 지금은 최고의 수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지구를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슈퍼히어로 영화는 미국인과 전 세계 관객의 안목을 해치고 있습니다.”

 

 

 

최소의 영화로 최고의 수익을

 

히트작의 재생산과 프랜차이즈가 돈이 되면서 대형 스튜디오들은 점차 소수의 블록버스터와 슈퍼히어로 영화에 집중하고 있다. 2017년도, 21.8%로 1위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한 디즈니는 소수의 블록버스터와 슈퍼히어로 영화 의존이 가장 심한 스튜디오다. 2017년 1위의 수익을 거둬들인 디즈니의 성적은 2편의 [스타워즈] 시리즈와 [미녀와 야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토르], [코코] 등 단 9편의 영화로 만든 성과이다.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디즈니는 2006년 픽셀 인수로 시작해, 2009년 마블, 2012년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를 보유한 루카스필름을 인수하면서 프랜차이즈 콘텐츠를 꾸준히 늘려왔다. 디즈니는 현재 엑스맨과 데드풀 등 영화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폭스 인수를 차근히 진행 중이다. 폭스 인수가 예정대로 늦어도 2019년 여름 이전에 마무리되면 디즈니의 시장점유율은 33.8%에 이르게 되고, 디즈니 영화의 대부분은 마블, 스타워즈, 픽셀 영화로만 채워질 전망이다.

스튜디오들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극장들 또한 성수기 상영 기간에 수익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에서 꾸준히 늘어나던 극장 관객수는 2002년을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2017년의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1995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미 전역 극장수도 최다를 기록한 1996년 7,798개에서 2017년에는 5,747개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물가 변화도 있지만 관객수 감소에 따른 수익을 만회하기 위해서 극장들은 꾸준히 영화관람료를 올려왔다. 1995년 평균 4.35 달러이던 관람료는 2018년 평균 9.16 달러로까지 올랐으며 대도시의 경우 거의 20 달러까지 육박하고 있다.

극장을 찾는 관객수가 감소한 이유로는 대중의 엔터테인먼트가 다양해진 이유도 있지만, 스튜디오와 극장은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 시장의 성장을 꼽고 있다. 특히 스트리밍 문화는 극장의 주 고객이 되는 18~24세의 영어덜트와 25~39세의 젊은 세대가 영화를 소비하는 습관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튜디오와 극장은 슈퍼히어로와 블록버스터 영화가 좀처럼 극장에 오지 않는 젊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아이맥스의 최고경영책임자 그렉 포스터는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끄고 거실 소파에서 벗어나 멀티플렉스로 가게 됩니다.” 라며 대형 영화를 옹호했다. 극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경험을 상품화할 수 있도록 아이맥스와 3D 영화, 상영관이 늘어가는 이유도 영화계의 그런 자구책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미지: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인피니티 워]가 국내에서 개봉하면서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다시 일었다. 이에 대한 극장 측의 반론은 ‘관객들이 원한다’는 것이었다. [인피니티 워]는 개봉 전부터 역대 최고라는 97.4%의 예매율을 보였고, 지금과 같이 흥행이 지속되는데 관객들을 위해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인피니티 워]가 미국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관객의 마블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피니티 워]는 미국과 한국 말고도 많은 나라에서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그럼 이렇게 전 세계 많은 관객이 원하기 때문에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슈퍼히어로나 프랜차이즈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관객의 입맛을 슈퍼히어로나 프랜차이즈 영화에 맞게 길들이고 있는 것일까? 닭과 달걀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금방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