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예하

 

 

세상에 트릴로지만큼 위험한 기획은 없다. 끝없이 재계약을 하든, 반응을 보고 사라지든, 팬들의 눈물로 지은 상여를 타든, 일반적인 시리즈에는 퇴로가 있다. 하지만 거대하고 완성된 골격을 짜고 그 안을 풍부하되 균형 있게 맞추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리하여 세상에 망한 트릴로지가 이렇게 넘쳐나게 된 것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연휴란 바야흐로 빈지 워칭의 계절이다. 명작과 망작이 뒤섞인 이 트릴로지들을 쭉 이어 보는 건 어떨까? 원래 남의 불행이 가장 즐거운 법이니까.

 

 

 

매트릭스 – 매트릭스 2 – 리로디드 – 매트릭스 3 – 레볼루션

 

이미지: 영화사마농㈜, 씨네클럽봉봉미엘

 

트릴로지하면 곧 ‘매트릭스’다. 망한 트릴로지라면? 그거야말로 ‘매트릭스’다.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매트릭스]는 그 즉시 전설이 되었다. 제대로 된 SNS도 없던 시절, [매트릭스]의 모든 장면과 캐릭터의 이름이 밈(meme)으로 소비되었다. 스미스나 오라클 같은 이름이 반갑기도 할 것이다. 한편 이제 누군가에겐 파란약이니 빨간약이니 하는 소리가 어리둥절할만한 시대다. 만일 당신이 [매트릭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이 3부작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로 여기서 [매트릭스] 트릴로지의 흥망이 판가름났다. [매트릭스] 1편은 온갖 크고 작은 문화적 레퍼런스를 통해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파란 약을 먹으면 별일 없이 세계의 이면을 모른 채 그대로 살아갈 수 있고, 빨간 약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진실된 세계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통 속에 든 뇌’라면, 우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도 유효했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액션에 이를 녹여내는 솜씨는 감탄스러웠다. 그러나 2편, 3편으로 갈수록 이 화두가 난해함으로 바뀐 것이 문제다. 온갖 인물들이 ‘동화’하고 ‘소거’되고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아키텍트’의 손을 떠나 세계를 넘나드는 시점까지 가면 감독 본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 중인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래서 더 궁금한 게 딱 하나 있다. 2199년에 20년 더 가까워진 지금,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는 밀레니얼들의 반응이다. 만일 당신에게 기회가 있다면 꼭 답을 귀띔해주길.

 

 

 

호빗 : 뜻밖의 여정 – 호빗 : 스마우그의 폐허 – 호빗 : 다섯 군대 전투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트릴로지를 애틋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는 아픈 손가락을 소중히 쥐고 가는 팬들의 마음이다. 첫 편, 혹은 그 세계관의 팬이 된 관객들은 온갖 해석과 해몽으로 이후의 망작들을 애지중지 데려간다. 어떨 땐 하도 퀄리티가 좋아서 본 망작도 다시 보게 될 정도다. 아무래도 [호빗] 트릴로지, 특히 그 마지막 편이 좋은 사례지 싶다.

트릴로지 전체가 영화적으로 크게 실패한 건 아니었다. 규모를 부풀리기 위해 원작 소설의 분위기를 바꾸어버렸다는 비판이 있긴 했지만, 앞의 두 편은 나쁘지 않은 흥행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트릴로지가 난리통이 된 이유는 따로 있다.

[호빗] 트릴로지는 사실 수많은 팬덤이 엎어 치고 메치는 전쟁터다. ‘톨키니스트’들 가운데서도 소설 [반지의 제왕]을 좋아하던 사람들, 그 동화적인 프리퀄인 [호빗]을 좋아하던 사람들, 그리고 피터 잭슨의 해석에 눈물을 흘리며 감명받은 사람들, 그다음엔 피터 잭슨을 죽여버리겠다고 하던 톨키니스트들, 이젠 영화 [호빗] 3부작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는 사람들까지. 조금 심술궂은 마음이지만 이런 난장판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결국 [호빗]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은 로튼토마토 지수 59%를 기록했다. 처참한 성적은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극단의 사람들이 알력 다툼을 하며 만들어 낸 수치일지 궁금하기는 하다.

 

 

엑스맨 – 엑스맨 2 – 엑스맨: 최후의 전쟁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의 개봉 일을 미리 점찍어 놓지 않는 것이 낯선 시대다. 지난주에 첫 번째 예고편을 공개한 [캡틴 마블] 개봉까지는 반년이 남았고, [아바타] 5편은 2029년 12월 19일에 개봉한다고 하니 되도록이면 살아 있을 일이다. 하지만 2000년대엔 달랐다. [엑스맨]의 3번째 작품이 각본 작업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개봉일을 잡은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앞선 두 편의 엄청난 성공 덕분이었다. 평단과 관객 모두 입을 모아 이 막 시작한 고참 히어로를 사랑했으니까.

그렇지만 항상 막내들이 문제다. 이 역사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도 역시 평단과 관객들이 입을 모았는데, 다만 형편없다는 비난으로 그 내용이 바뀌었을 뿐이다. 사실은 얼마간 예견된 일이었다. 브라이언 싱어와 매튜 본이 잇따라 이 영화에서 탈출 버튼을 눌렀고, 캐스트도 수없이 바뀌었다. 폭스가 새로운 감독 브렛 라트너를 찾아 앉힌 때는 이미 개봉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요즘 블록버스터들을 몇 년씩 만드는지 생각해보면 거의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엑스맨] 시리즈는 이후 근 10년간 꽤 괜찮은 스핀오프들로 한풀이를 하고 있다.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이제 이 초능력자들이 마블과도 만난다 하니, [엑스맨] 3편쯤은 오히려 못 나온 졸업앨범 사진 같은 재미가 될 듯.

 

 

오션스 일레븐 – 오션스 트웰브 – 오션스 13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트릴로지가 위험하단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언젠가 끝이 있어야 한다면 트릴로지였다고 하는 편이 깔끔한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편들이 보통 질척임의 고배를 마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션스] 시리즈에서는 외려 중간이 문제다.

[오션스 일레븐]은 스티븐 소더버그 영화의 정수와도 같다. 1960년 원작이 가진, 스릴과 공존하는 묘한 나른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게다가 영화팬이라면 단숨에 알아볼 장르 영화의 컨벤션을 얼마나 리드미컬하게 엮었는지. 전문가들이 금고 터는 영화는 누구나 좋아하니 더할 나위 없다. 통탄은 바로 이 ‘잘 만듦’에 기인한다. 심지어 급한 내리막을 달렸던 2편과 달리 3편은 꽤 성공적이기까지 하니 둘째가 밉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오션스가 한 번 더 모인다는 소식에 관객들은 열광했지만,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절도 영화답지 않게 너무 느슨해진 [오션스 트웰브]에 대한 반응은 미적지근과 혹평 사이를 떠돌았다. 결국 [오션스 13]에 다다랐을 땐 그 영향으로 겸손한 흥행성적을 받아들어야 했다.

그러나 11년 뒤, 세계 영화계에 어퍼컷을 날리는 [오션스8]이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다. 그리고 그 여동생의 뒤를 좇아본 지금에도, 사실 이 희대의 도둑 대니 오션이 어디 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토르: 천둥의 신 – 토르: 다크 월드 – 토르: 라그나로크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케네스 브래너의 이름에 흥분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햄릿]과 [추적] 등 밀도 있고 고급스러운 작품들을 만든 이 천재 감독/배우/각본가가 [토르] 트릴로지의 포문을 열었다. 1500살 먹은 어벤저보다 그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덴 이유가 있다. 그가 빚어놓은 [토르] 트릴로지 첫 편의 세계는 설정에 걸맞게 ‘셰익스피어적’으로 아름답고 꽤 견고했다. 그런 이 트릴로지가 리스트에 오른 건, 시리즈의 일관성이 완전히 난도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르가 그렇게 인기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데는 웬만히들 합의할 것이다. 이 트릴로지 역시 어벤저 단독 영화 가운데서도 흥행이 저조한 편이었다. 애초에 MCU로 캐릭터를 들여올 때 많은 변환을 거치기도 했고 그에 따라 첫 편의 ‘고고한’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지구인들을 지적 생명체 취급도 않던 외계의 왕족이 어벤져스의 허당이 된 건 솔직히 좀 슬픈 일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세 편의 감독이 모두 달랐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세계관 설정과 분위기, 전체적인 밀도가 어긋나고 흐려진 것이다. 트릴로지에서 특별히 삿대질할 영화가 없는 이유다.

이런 사정이 아무렴 일관성을 없앴긴 하지만, 미디어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고전적인 각본가 브래너가 첫 편을 감독하고, TV 수작들을 만들어낸 앨런 테일러를 지나, 젊고 경쾌한 타이카 와이티티가 트릴로지를 끝맺는다는 점은 무척 즐겁고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