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빈상자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드라마의 인기와 파급력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거나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 미드 속 미국 문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은 영화보다는 미드를 보면서 느낄 때가 많다. 미드가 적어도 십여회, 많으면 십여년이 넘도록 우리와 함께 하며 같은 인물의 일상을 꼼꼼하고 반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 CBS

 

다양한 인종과 이민 세대로 구성되어있고 땅도 넓은 미국의 문화를 한 마디로 단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미드를 보면서 쌓여온 그간의 궁금증과 오해를 어느 정도는 풀어보고 싶어서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외국인들이 한드 하나만 보고 우리가 모두 김치싸다구를 날리는 민족이라고 오해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하는 심정으로.

 

 

 

1. 한 박스로 정리되는 회사 생활

 

이미지: NBC

 

회사를 그만두고 떠날 때면 개인 물건을 정리해서 담은 종이박스 하나를 들고 나선다. 가방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도 어김없이 박스를 챙기고, 오래 일해서 짐이 많은 것 같을 때도 끌어안고 있는 박스는 언제나 하나뿐이다. 자발적으로 퇴사할 때도 정리를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종이박스는 특히 극중 인물이 해고를 당하는 상황에 주로 등장한다.

이쯤 되면 미국에선 해고하면 회사에서 ‘해고자정리용박스’를 하나씩 지급하는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그런 회사는 없다. 오히려 달라고 해도 안 줄 가능성도 크다. 미드에서 쓰는 종이박스는 보통 미국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쓰는 카드보드 박스인데, 몇 푼 안 하기는 해도 엄연히 회사비품이기 때문이다. 짤린 것도 서러운데.

그게 치사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미드에서 보았던 처량한 장면이 생각나서인지, 현실에서 종이박스에 물건을 정리해서 떠나는 미국인을 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가방이든 상자든 집에서 담을 컨테이너를 가져오는 데다 보통은 몇 주전에 해고 통고를 받기 때문에 미리 조금씩 물건을 옮기게 된다. 다만, 종이박스가 아니라 루이비통에 담아 간다고 해도 해고돼서 회사를 떠나는 마음은 똑같이 비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미지: NBC

 

[오피스]에서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앤디가 마침내 폭발하고 해고되면서 결국 종이박스를 들게 된다. 하지만 그런 [오피스]에서도 매니저 마이클(스티브 카렐)이 7년 간 일한 회사를 떠날 때는 홀가분하게 빈 손으로 나선다. [오피스] 인기의 견인차이자 중심이었던 마이클에 대한 리스펙이었다.

 

 

 

2. 전남편과 같이 밥을 먹자고?

 

이미지: HBO

 

“여보, 내일 전남편 만날 건데 당신도 올래?” “ㅇㅇ?”
한국인들에게 아주아주 상당히 드문 일 중의 하나는 전남편이든 전부인이든, 전남친이든 전여친이든, 현재 배우자나 연인의 ‘엑스(ex)’를 만나 본 경험이다. 미드에서는 엑스를 함께 만나거나 심지어 좋은 친구로 지내기도 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쿨한 건지 속도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인으로서는 속이 뒤집히거나 머릿속이 복잡해질 만한 상황인데.

한국에서는 한 세대 전만 해도 이혼한 부모를 한 자리에서 같이 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아이를 위한 배려로 또 면접교섭권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정기/부정기적으로 이혼한 부모도 같이 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뭐,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지: 쇼타임

 

미국인들이라고 그러한 상황을 마냥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확실히 우리보다는 배우자와 연인의 ‘과거’에 이해의 폭이 넓은 편이다. 그렇다고 [프렌즈]처럼 6명 안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귀어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10년을 절친으로 지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빅 리틀 라이즈]에서 매들린(리즈 위더스푼)은 질풍노도의 십 대 딸 덕분에 전남편과 연락할 일이 많다. 서로 책임을 미루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는 너희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위안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아내와 가정의 평안을 위해 4명이 함께 하는 식사를 제안하는 사람은 매들린의 남편이다. 이 드라마에서도 특히 착하다고 소문난 남편이었기에 가능한 일로 보이겠지만, 현실에서 본다고 해도 미국 문화에서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칭찬받을 만한 배려심인 것 틀림없다.

 

 

 

 

3. 커피 리필이 무료?

 

이미지: 쇼타임

 

미드 주인공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단골로 다니는 식당 하나쯤은 두고 있다는 것이다. 들어서자마자 웨이트리스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주문은 ‘늘 먹던 걸로’하면 끝난다. 게다가 무엇을 먹던 보통 커피가 곁들여지기 마련인데 잔이 모두 비워주기도 전에 웨이트리스가 와서 커피를 다시 채워준다. 근데 이거 무료 맞죠?

혹시 단골들에게만 주는 특혜가 아닐까 싶지만, 실제로 미국에는 무료로 커피를 리필해주는 식당이 많다. 주로 서민들이 식사를 하는 다이너를 비롯 음료 판매가 주가 아닌 경우에 해당하며,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따라준다. 커피와 함께 탄산음료도 미국에서 무료로 리필이 가능한 대표적인 음료인데 패스트푸드 점에서 상당히 일반적이다. 바에서는 일행 중 운전하기 위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의 음료값은 아예 안 받기도 한다.

 

이미지: AMC

 

미국에서 커피와 탄산음료의 무료 리필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마케팅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원가가 워낙 저렴해서 몇 잔을 퍼준다고 해도 여전히 이윤이 남는 품목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커피가 저렴한데도 그렇다고 한다.

아무리 마케팅이고 팁 때문이라고는 해도 꼼꼼히 챙겨주고 웃으면서 리필해주는 친절함에 손님도 커피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하듯 매일 커피를 마신다는 [트윈픽스] 쿠퍼 요원(카일 맥라클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쿠퍼 요원의 다이너 커피 사랑은 25년 만에 돌아온 [트윈픽스] 시즌 3에서도 이어졌다.

 

 

 

 

4. 잠깐만요, 신발 안 벗어요?

 

이미지: CBS

 

미국인들이 집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는다는 건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오히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은 현관문 앞에 얌전히 벗어두고 맨발로 다니는 문화가 더 적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물론 많은 유럽인들조차 미드를 보고 경악하는 것은 신발을 신고 침대 위에 까지 올라가는 미국인들의 모습이다. 우리라면 엄마의 잠재력을 느낄 수 있는 강력 등짝스메싱감인데, 부모하고 살지 않기 때문일까?
개념상실에 위생관념 제로로 보이지만 물론 실생활에서는 나름의 예의와 규칙이 존재한다. 우선, 미국에서 모든 집 문 앞에는 도어매트(doormat)가 있다. 자신의 집은 물론이고 특히 남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여기에 슥싹슥싹 신발 바닥을 잘 닦아야 하는 것이 예의다. 일반적이진 않지만 꼭 아시안이 아니더라도 실내에서는 슬리퍼나 인도어(indoor) 신발을 신는 가정도 꽤 있다.

 

이미지: CBS

 

그럼, 비나 눈 때문에 신발이 더러워지면 어떡할까? 자신의 집이라면 집에 와서 다른 신발로 갈아 신고 남의 집이라면 들어가기 전 양해를 구한다. 그럼 주인이 괜찮다고 하거나 슬리퍼 등을 주기도 한다. 정원사나 배관공 등 일의 성격 때문에 신발이 더러운 경우가 많은 사람들은 비닐커버를 가지고 다니며 고객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에 씌운 후 들어오기도 한다.

그래 그래, 거기까진 괜찮다 치고, 그럼 침대에 신발 신고 올라가는 건? 미국인들도 이건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인들도 신발을 신은 채로 침대에 오르는 장면들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미드가 차문도 집안 현관문도 잠그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침대에 오르기 전에 신발을 벗는 모습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차피 배우나 감독이나 그 침대에서 잘 생각은 없으니까.

 

 

 

 

5. 1 가구, 1 정신과 의사?

 

이미지: HBO

 

최근에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우리에겐 정신과를 방문하거나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조차 혹시나 직장이나 취업에 관련해서 불이익은 없을는지, 또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으로 망설이게 된다.
반면 미드를 보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부럽다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도 해야 할지, 우리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도 없다고 자부해왔는데 정작 모든 국민들이 한두 가지 정신적인 고통을 다 겪고 있는 곳은 미국인 듯 보인다.

미드에서 상담하는 장면이 흔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것이 인물의 심리적인 배경과 상태를 설명해주기 위한 장치가 된 것도 있다. 마피아 보스가 꾸준히 심리치료 상담을 받는 [소프라노스]는 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미드다. 최근 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했던 [빅 리틀 라이즈]에서도 셀레스티(니콜 키드먼)의 복잡한 마음이 상담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미지: HBO

 

한국보다는 거부감이 적다고는 하나, 미국에서도 정신과 상담에 대해서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현재 힘들다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까. [소프라노스]의 토니는 마피아의 보스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를 오랫동안 숨겼다. 일반인들이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있어도 굳이 떠벌이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심리치료 상담을 받는 날에는 그냥 ‘의사와의 약속’ 있다고 말할 뿐이다.

무엇보다 실제로는 심리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상담을 받는 일이 미드보단 일반적이진 않다고 할 수 있는데 그건 거부감 때문이라기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보험이 있다면 $20 정도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50분 남짓 상담에 최소 $65에서 $250까지 매번 꼬박꼬박 입금해야 한다. 잘한다는 소문이 조금이라도 났거나 유명한 심리치료사 같은 경우에는 그 금액이 한계를 모르고 올라간다. 암튼, 의사와 관련해서는 무엇이든 싼 것이 없는 미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