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천만 영화 5편이 나왔지만 마냥 웃을 수 없다. 흥행성이 높은 영화에 상영관이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영화 상영 조건이 이전보다 더 악화됐다. 들쭉날쭉한 퐁당퐁당 시간표는 기본, 그나마도 이른 오전이나 심야에 배정받거나 소규모 개봉에 불과해 영화관을 향하는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다 극장가에서 금세 사라진 영화들이 정말 많다. 그중 누적 관객수 만 명 미만의 좋은 영화를 소개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사심을 담아 만 명을 살짝 상회하는 영화 두 편도 추가했다. 12편의 영화 중 얼마나 보았는지 확인해보자.

이미지: 마노엔터테인먼트

우먼 인 할리우드(This Changes Everything) – 9,802 명

나탈리 포트만, 클로이 모레츠, 메릴 스트립, 리즈 위더스푼, 제시카 차스테인 등 할리우드 여성 영화인 96인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188편의 작품과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할리우드 미디어 산업 안팎에 만연한 기회 불평등과 성차별을 말한다. 제작에도 참여한 지나 데이비스가 설립한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제시해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 미디어와 콘텐츠에서 배제된 여성 캐릭터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미디어가 어떻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와인스타인], [밤쉘],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여배우들의 티타임] 등 올해는 [우먼 인 할리우드] 외에도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주)

러브리스(Loveless) – 9,810 명

제70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러시아 영화계의 거장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작품. [러브리스]는 이혼을 앞둔 부모가 서로에게 자신을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열두 살 소년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한 가족의 비극적인 붕괴를 담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비정한 풍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이를 떠넘기기 바쁜 부부는 진정한 사랑을 잃고 짧은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하며, 일그러진 욕망과 어리석은 이기심이 자초한 황량하고 냉랭한 적막감이 시종일관 무겁게 짓누른다.

이미지: (주)트리플픽쳐스, 씨네블루밍

논-픽션(Non-Fiction) – 8,717 명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예리한 통찰력과 유쾌한 유머 감각이 번뜩인다. ‘종이책’과 ‘E북’이라는 변화의 상황에 놓인 인물들과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모를 이들의 쿨한 관계를 섹시하고 지적인 대화와 능청스러운 유머로 담아낸다. 영화 내내 열띤 대화를 주고받는 인물들의 말에는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현대인의 고민이 녹아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사유하며, 얽히고설킨 관계를 통해 영화적인 재미를 추구한다.

이미지: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하이 라이프(High Life) – 2,978 명

클레어 드니 감독의 첫 영어 영화 [하이 라이프]는 기존 SF 영화의 관습을 타파하며 심오하고도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태양계 너머 우주 공간에서 실험 대상이 되기로 한 범죄자 무리와 과학자가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외딴 우주선에서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어지는 이야기를 독특한 화법으로 담아낸다. 내러티브는 결코 친절하지 않지만, 관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담한 상상력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모호한 결말은 색다른 SF의 매력을 전한다.

이미지: 엠엔엠 인터내셔널

트루 시크릿(Who You Think I Am) – 5,987 명

겉보기엔 완벽하지만, 실제는 외롭고 쓸쓸한 중년 여성이 SNS를 통해 새로운 사랑과 삶을 꿈꾸는 이야기. 줄리엣 비노쉬가 남성에게 잇따라 버림받고 가짜 계정을 통해 공허한 내면을 채우고 삶의 활력을 얻기 시작하는 클레르의 이중생활을 우아하고 섬세한 연기로 그려낸다. 절박한 욕망이 자아낸 이중생활은 소셜미디어의 양면성과 현대 사회의 사랑과 병폐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미지: (주)팝엔터테인먼트, (주)콘텐츠 게이트

언더 더 실버레이크(Under the Silver Lake) – 3,016 명

2014년 공포영화 [팔로우]로 주목받은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작품.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청년 백수 샘이 사라진 이웃집 여성 사라를 찾아 각종 의문과 마주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LA 언덕 위에 즐비한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전 세계 쇼비즈니스의 중심지 로스앤젤레스에 떠도는 음모와 부패, 비밀스러운 암호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내고 고전 누아르의 정취가 물씬한 영화로 담아낸다. 괴랄하게 느껴질 만큼 독특한 분위기와 모호한 전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이미지: KT&G 상상마당

보희와 녹양(A Boy and Sungreen) – 5,848 명

저마다의 고민을 가진 10대들의 무공해 성장담. 한날한시에 태어난 14살 단짝, 소심한 소년 보희와 대담한 소녀 녹양이 보희의 죽은 줄 알았던 아빠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성과 가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10대의 우정과 성장을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로 담아내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어둡고 파괴적인 10대의 이야기가 부담스럽다면, 따스한 시선으로 토닥이고 응원하는 [보희와 녹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미지: 영화사 진진

아워 바디(Our Body) – 9,021 명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는 8년 차 행정고시생 자영이 우연히 알게 된 현주를 만나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이야기. 시놉시스만 들으면 서글픈 청춘을 응원하는 영화 같지만, 관객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무기력한 자영이 달리기를 시작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이야기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억눌려왔던 원초적인 욕망을 발현하는 데 더 관심을 둔다. 순수한 육체적 쾌감이 만들어낸 변화는 의외로 대담하며 관습에서 벗어난다.

이미지: (주)영화사 오원, (주)제이브로

그녀들을 도와줘(Support the Girls) – 1,712 명

스포츠바 매니저 리사와 함께 일하는 여성 직원들의 녹록지 않은 일상을 그린 영화. 취약한 노동환경에도 마음을 나누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상들의 이야기는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성차별, 부당 해고 등 무거운 주제를 위트 있게 풀어낸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데, 특히 레지나 홀과 헤일리 루 리차드슨이 탁월한 연기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를 더욱 빛나게 한다.

이미지: M&M 인터내셔널

스탈린이 죽었다!(The Death of Stalin) – 5,546 명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죽고 난 후 음모와 계략이 오가는 권력다툼을 그린 블랙코미디. [부통령이 필요해]의 아르만도 이안누치 감독이 파비앵 뉘리와 티에리 로뱅의 그래픽 노블을 각색해 스탈린 죽음을 전후로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는 드라마로 그려낸다. 스티브 부세미, 제이슨 아이삭스 등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더해져 스탈린 시대의 살벌한 풍경을 우스꽝스러운 부조리극으로 되살린다.

이미지: 소니픽처스코리아

글로리아 벨(Gloria Bell) – 10,931 명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이 2013년 선보인 [글로리아]를 영어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작품. 이야기 구조는 폴리나 가르시아 주연 영화와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재탕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세심한 연출과 줄리안 무어의 경이로운 연기에 절로 찬사가 나온다.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에서 쉽게 배제되는 중년 여성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며, 존경과 애정의 마음을 담아 더욱 의미 있는 공감을 자아낸다.

이미지: (주)더쿱, (주)팝엔터테인먼트

신문기자(The Journalist) – 10,050 명

일본 영화로는 드물게 정부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 아베 정권의 정치 스캔들에 모티브를 얻어 권력을 독점한 국가 시스템과 그에 순응하는 저널리즘의 민낯을 드러낸다. 증거 조작, 가짜 뉴스, 댓글 부대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은 더욱 사실적은 공감을 끌어내고, 주연을 맡은 심은경의 언어와 국적을 초월하는 호연도 인상적이다. 심은경은 지난 11월 17일 제29회 타마 시네마 포럼에서 최우수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