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의 겨울 하늘처럼 차갑고 황량한 노르딕 누아르(스칸디나비아 누아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덴마크에서 건너온 이 음울한 범죄 장르는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를 시작으로 책, 영화, TV 등의 대중문화로 퍼져 나갔다. 작품은 대체로 북유럽의 신비롭고 고요한 풍경과 대비되는 잔혹한 사건을 중심에 두고, 복잡한 사생활에 둘러싸인 자기희생적인 주인공이 밤낮으로 수사에 몰두하며 점차 편견과 증오, 위선, 추악한 욕망에서 비롯된 어두운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다른 어떤 범죄물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며, 느릿하지만 묵직하게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는 긴장을 조성한다. 무엇보다 사건이 해결되고도 끝난 것 같지 않은 쌉싸름한 기분이 노르딕 누아르를 계속 찾게 되는 매력이다. 늪에 빠진듯한 우울감이 혀끝에 맴도는 노르딕 누아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는 어떤 게 있는지, 북유럽을 넘어 그 영향을 받은 작품과 함께 소개한다.

월랜더(Wallander) 2008~2016

이미지: BBC One

TV 드라마에서 노르딕 누아르의 시작은 헨닝 망켈의 소설을 각색한 [월랜더]다. 2008년 BBC에서 첫 방영한 [월랜더]는 가족에게는 죄책감을, 피해자에게는 연민을 느끼는 애처롭고 고독한 형사 월랜더가 등장한다. 스웨덴 남쪽 도시 이스타드의 밝고 푸른 하늘과 목가적인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과 반대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기이하고 섬뜩하다. 드라마는 고집스러운 형사 월랜더가 때때로 개인적인 문제로 비틀거리면서도 신중하고 끈기 있게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케네스 브래너 주연의 [월랜더]가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지만, 실은 크리스터 헨릭슨이 활약한 스웨덴의 동명 작품(2005~2013)이 원조다.

포티튜드(Fortitude) 2015~2018 이미지: Sky Atlantic

이미지: Sky Atlantic

노르딕 누아르는 대개 고립된 지역성을 강조하며 음산한 불안감을 조성한다. [포티튜드]는 거기에 호러 미스터리를 가미해 차별화를 둔다. 지금껏 살인사건이 발생한 적 없는 평화로운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잔혹한 죽음이 발생하고, 이어 몇몇 사람들도 난폭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마을의 보안관 댄 앤더슨이 사건을 수사하지만, 다른 범죄물의 수사관처럼 진득한 믿음을 주진 못한다. 그 역시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기 때문인데, 시즌 1에서는 수사를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이방인을 등장시켜 갈등을 증폭시킨다. 보안관 댄을 연기한 리차드 도머가 세 시즌을 이끌며, 시즌 1에서는 스탠리 투치가, 시즌 2에서는 데니스 퀘이드가 출연해 비밀과 욕망이 얽힌 이야기로 안내한다.

트랩트(Trapped) 2015~

이미지: 넷플릭스

아이슬란드의 외딴 항구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미스터리를 다룬 [트랩트]의 매력은 황량하고 차디찬 겨울의 날씨다. 평화로운 마을을 혼란에 빠뜨리는 시신,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비밀과 갈등, 세 명이라는 한정된 수사 인원, 그리고 여기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거센 눈보라를 더해 비극적인 과거에서 비롯된 사건을 추적한다. 시즌 2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겨울의 눈 폭풍은 없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비밀이 많고, 지역개발사업 뒤에는 부도덕한 일들이 벌어지며, 사건은 오래전 비극에서 비롯된다. 시즌 3 제작이 확정됐으며, 촬영 및 공개 시기는 미정이다.

발할라 살인(The Valhalla Murders) 2019

이미지: 넷플릭스

가장 최근에 공개된 [발할라 살인]은 “오딘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들의 영혼이 머무는 궁전”을 뜻하는 북유럽 신화에서 제목을 따왔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파고드는 노르딕 누아르만의 매력을 전하며, 아동학대의 비극이 얽힌 사건을 추적한다. 승진에서 좌절한 지역 수사관 카타와 오슬로로 떠났다가 수사를 위해 고향에 돌아온 외부 형사 아르드나르가 주축이 되어 아이슬란드에서 최초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한다. 마지막까지 숨을 조이며 거듭되는 반전이 인상적이다.

데드윈드(Deadwind) 2018~2020

이미지: 넷플릭스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한 [데드윈드]는 노르딕 누아르에 기대하는 음산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복잡한 개인사에 놓인 강인한 여성을 등장시킨다. 직감이 먼저 앞서는 열혈 형사 소피아, 그는 두 달 전에 남편을 잃고, 죽은 남편의 자녀와의 관계도 껄끄럽다. 하지만 빠르게 업무에 복귀해 규칙주의자 신참 누르미와 파트너가 되어 사회복지사의 죽음을 수사한다. 소피아는 상실의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수사를 주도하며 복잡한 이해관계와 감정이 얽힌 사건의 진실에 다가선다. 곧 시즌 2가 공개될 예정이다(국내 미정).

경계선에서(Borderliner) 2017

이미지: 넷플릭스

가족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경계선에서]의 주인공 니콜라이는 안타깝게도 잘못된 궤도에 들어선다. 가족을 보호하고자 동생이 자살로 위장한 살인사건을 은폐하기로 결심한 것. 니콜라이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 안니켄이 눈치채지 못하게 수사 방향을 돌리려고 하며 고양이와 쥐의 게임을 시작한다. 노르웨이에서 제작한 [경계선에서]는 어둡고 부패한 범죄에 가족이 얽힌 개인사를 강하게 끌어들여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낸다.

살인 없는 땅(Bordertown) 2016~

이미지: 넷플릭스

대부분의 북유럽 범죄 스릴러가 관계와 동기가 복잡하게 얽힌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끌어간다면, [살인 없는 땅]은 2~3화에 걸쳐 진행되는 여러 개의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극의 중심에는 기억력이 뛰어난 형사 카리가 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평온한 일상을 위해 대도시 헬싱키를 떠나 러시아 국경 근처의 휴양지 마을 라펜란타로 이사한다. 하지만 성매매, 마약거래 등이 얽힌 강력 범죄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살인 없는 땅]의 가장 큰 매력은 기존 북유럽 범죄물과 달리 뛰어난 수사 능력을 가진 인물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런 신선함 때문인지 핀란드에서 첫 방영됐을 때 인구의 1/5이 시청했다고.

퀵샌드: 나의 다정한 마야(Quicksand) 2019

이미지: 넷플릭스

넷플릭스의 스웨덴 오리지널 시리즈 [퀵샌드: 나의 다정한 마야]는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이 아니라 피해자 혹은 가해자인 고등학생 마야에게서 시작한다. 말린 페르손 지올리토의 소설을 원작으로, 평온한 오후를 순식간에 핏빛 참극으로 뒤바꾼 총기난사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 공모자로 지목된 마야가 사건에 동참했는지 궁금증을 유발하며, 부유하고 말썽 많은 남자친구 세바스찬과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와 현재를 흥미롭게 교차한다. 비극적인 진실로 다가서는 과정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연상시킨다.

브론(Bron) 2011~2018

이미지: SVT1

[브론]은 다른 국적을 가진 두 형사의 파트너십을 다룬다. 스웨덴 남부의 항구도시 말뫼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잇는 다리의 국경선에 절단된 시신이 발견되자, 스웨덴의 무뚝뚝한 형사 사가와 덴마크의 거칠지만 친절한 형사 마르틴이 협력하여 살인범을 추적한다. 시즌 4까지 공개됐으며, 스웨덴 형사 사가가 계속해서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브론]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리메이크됐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경계에서 벌어진 [더 터널(2013~2018)],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더 브릿지: 조각 살인마(2013~2014)],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한 [Der Pass(2018)],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사이에서 일어난 [더 브릿지(2018)]가 있다.

힌터랜드(Hinterland) 2013~2016

이미지: 넷플릭스

[힌터랜드]는 영국 남서부 지방 웨일스의 애버리스트위스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따라가는데, 그 여정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월랜더]에 영감을 받은듯하다. 오래된 해변 도시는 아름답지만 쓸쓸하고 황량한 정서가 짙게 배어있고, 사건을 이끄는 마티아스 경감은 복잡한 가족사를 끌어안은 채 일과 사생활의 경계 없이 사건에 매달린다. 90여 분의 에피소드는 [월랜더]처럼 개별적인 사건을 다루며, 답답하게 짓누르는 우울감을 선호한다면 한 편씩 꺼내보자.

마르첼라(Marcella) 2016~

이미지: 넷플릭스

[마르첼라]는 [브론]의 한스 로센펠트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해 어디서도 볼 수 없던 강렬한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둔다. 남편과 이혼 위기에 처한 마르첼라가 오래전 놓친 연쇄살인범을 붙잡기 위해 형사로 복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혼란스러운 기억과 교차하며 고통스럽게 흘러간다. 마르첼라란 인물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심리 드라마이자 잔혹한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수사물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주인공의 개인적인 문제가 워낙 커서 숨 막히게 처절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마르첼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시즌 3가 공개될 예정이며, 시즌 1에서는 신인 시절의 플로렌스 퓨를 볼 수 있다.

탑 오브 더 레이크(Top Of The Lake) 2013~2017

이미지: Sundance TV

[탑 오브 더 레이크]는 뉴질랜드의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 뒤로 숨어든 추악하고 잔혹한 욕망을 폭로한다. 영화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 감독이 연출 및 각본, 제작에 참여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진 형사 로빈이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에 매달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2013년 공개된 시즌 1은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에서 임신한 사실이 알려진 12세 소녀가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2017년 “차이나 걸”이란 부제로 방영한 시즌 2는 그로부터 5년 후 뉴질랜드에서 시드니로 돌아온 로빈이 해변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여성의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엘리자베스 모스가 주인공 로빈을 연기하며, 홀리 헌터와 니콜 키드먼이 각각 시즌 1, 2에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