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드라마라서 했다. 독특하고 재미있었다”라는 이영애의 말처럼 [구경이]는 이제껏 본 적 없는 K-드라마의 세계로 안내한다. 경찰 출신 보험조사관 구경이가 사고로 위장된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범상치 않는 개성을 지닌 인물들과 함께 매번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재치 있게 흘러간다. 주요 인물부터 연출, 편집, 서사, 음악 등 드라마를 이루는 많은 부분이 ‘한드’의 전형성을 탈피하며 신선함을 선사한다. 다루는 내용은 어두운데 마냥 무겁지 않고, 경쾌한 리듬감으로 흘러가면서도 필요할 때는 서늘한 무게감을 드리운다. 12부작 중 절반을 넘긴 8회까지 방영됐음에도 이야기의 종착지가 어디로 향할지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 만큼 [구경이]가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이미지: JTBC

[구경이]는 방영 전부터 이영애의 파격 변신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우아함의 대명사 같았던 이영애가 부스스하게 산발한 머리, 대충 보이는 대로 걸친 듯한 너저분한 차림새로 등장해 게임에 매달리고 술을 물처럼 마시니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가 전부가 아니다. 그가 맡은 구경이란 캐릭터가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구경이는 기존 작품에서 보여준 40대 여성상의 관습적인 이미지를 타파한다. 가족 간의 정이나 세속적인 욕망보다는 원칙과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으니 무엇이든 끊임없이 의심하며 영민한 두뇌로 사건을 파헤치는 모습이 새롭고 짜릿하다.

구경이의 주변 인물도 마찬가지다. 구경이와 평행선을 달리며 묘한 대립각을 세우는 케이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선입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겉보기엔 살인이란 어두운 욕구를 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밝고 천진하며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오금이 저릴 만큼 무감하고 공감 능력도 없다. 게다가 많은 연쇄살인범 캐릭터에서 봐왔던 혐오의 범죄와도 궤를 달리한다. 케이는 자신만의 살인 기준을 세워 약자를 괴롭히고 짓밟는 죽어 마땅한 인간들만 골라 완벽하게 살해한다.

기존의 범죄물이 대개 남성 수사관과 남성 범죄자의 쫓고 쫓기는 대립 구도로 진행하며 여성 캐릭터를 단순 조력자나 피해자로 그려왔던 것과도 다르다. 구경이의 후배 나제희는 집에만 틀어박혀 게임에 열중하는 구경이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온 유일한 사람이다. 나제희는 구경이에 대한 애정과 성공에 대한 야망이라는 두 선택지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갖는다. 첫 등장부터 ‘파격’을 몸소 보여줬던 용국장은 케이를 뛰어넘는 악역으로 보일 만큼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인물이다. 구경이에게 케이를 잡자며 먼저 손을 내민 그가 음흉한 속셈을 갖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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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을 여성들로 포진했지만, 조력자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 또한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가 구경이의 성실한 조수 산타다. 구경이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는 무엇 때문에 조수를 자청한 건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말간 외모에 시선이 가면서도, AI 보이스로 소통하며 구경이 곁을 맴도는 의도가 의심스럽다. 구경이에게 툭하면 ‘저기씨’라 불리는 나제희의 부하 직원 경수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무난한 축에 속하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존재감에 되려 인간적인 연민이 쌓인다. 케이의 조력자 건욱은 음모와 죽음이 횡행하는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하는 인물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드물게 동성애자의 연애를 평범한 일상으로 보여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케이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날지 궁금하다.

BBC 영드 [셜록]이 재치 있고 감각적인 화면 구성으로 남다른 관찰력과 추리력을 지닌 셜록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구경이] 역시 만화 혹은 연극적인 기법의 장면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흥미를 돋운다. 구경이가 케이의 완벽한 계획을 역으로 추론하는 과정은 구구절절 설명 대신 연극 무대로 재현하고, 구경이가 술의 힘으로 기운을 차리는 모습은 게임 캐릭터가 코인을 흡수하고 에너지를 얻는 것에 비유하는 식이다. 의도적인 B급 감성이 [구경이]만의 독특한 개성을 공고히 한다. 이 같은 연출 스타일에 맞게 두 주인공을 맡은 이영애와 김혜준은 평소보다 살짝 과장된 톤의 연기를 선보이며 캐릭터와 서사의 밸런스를 맞춘다.

[구경이]는 일찌감치 구경이가 잡아야 할 케이를 드러낸 뒤, 의문을 쌓아가며 두 인물의 거리를 좁히는 방식으로 진행해왔다. 이제 서로의 존재를 확실하게 자각하는 두 사람은 7-8화를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케이를 잡기 위해 구경이가 놓은 덫이 용국장의 마수에 걸려들어 살인을 게임처럼 즐겼던 케이에게 큰 비극을 안긴 것이다. 지난 8회에서, 작전의 참담한 실패로 다시 세상을 등진 구경이와 이모의 죽음 이후 폭주하는 케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이 세계 최고의 포식자 용국장의 삼자대면 엔딩으로 놀라움을 안겼는데, 남은 이야기에서 구경이를 둘러싼 관계들이 또 어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