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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65세 이상 무임승차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무임승차 논쟁은 매번 거세게 타오르다가 묻히기를 반복했다. 여태껏 탁상공론에 그쳤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이미 어떤 지자체는 무임승차 연령을 70세로 상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다른 지자체들도 곧 칼을 뽑아들 것으로 보인다. 누적되는 적자를 지금처럼 세금으로 메꾸기란 장기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무임승차 연령 상향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합당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결정을 도출하기 위해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세대갈등이 대표적이다. 상당수 비용을 떠안는 65세 미만 인구가 불만을 표출했다.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가 부담을 져야 하는 국민연금도 볼멘소리가 나온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현 추세가 바뀌지 않는 한 적잖은 진통이 이어질 것이다.

90대 노인의 버스로 국토종단한 이야기 ‘라스트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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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 시의적절한 영화가 개봉했다. 90대 노인의 국토종단을 그린 영국 영화 [라스트 버스]다. 언어와 풍광은 다르지만 그 이면에 있는 현실은 낯설지 않다. 주인공 톰은 먼저 떠나보낸 부인 메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나긴 여정에 나선다. 목적지는 랜즈엔드(Land’s End), 우리로 치면 땅끝마을인 셈이다. 영국 최북단에서 시작해 최남단에 도착하는 여행. 이 먼 거리를 톰은 버스만 타고 도달하려 한다. 작은 짐가방과 노인 무료 교통카드를 들고 톰은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톰은 버스 안팎에서 다양한 사람을 맞닥뜨린다. 앞 좌석에 앉은 아이의 장난을 받아주고, 연인과 다투고 집을 나온 남자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깜빡 잠이 들어 목적지를 지나쳤던 어느 밤에는 낯선 이들의 친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시골에서는 양들과 좌석을 공유하고, 술에 취해 흥겨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톰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궂은 날씨에 야외에서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방심한 사이에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한다. 한 승객이 부르카와 히잡을 착용한 무슬림 여성을 조롱하자 이를 지적하고 그 결과 보복을 당하기까지. 온갖 고초 속에서도 톰은 그저 버스를 오르고 내린다. 묵묵히 나아가는 톰을 보면서 버스 승객들은 다채로운 감정을 느낀다. 이런 사연이 SNS에서 퍼지면서 톰은 ‘#버스영웅’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왜 톰은 버스로 이동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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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스트 버스]의 이야기는 평면적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대체로 톰에게 고정되고, 몇 가지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극의 톤은 일정하게 유지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인상 깊었던 장면들과 의문점이 있기에 짚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왜 하필이면 ‘버스로 이동했는가’이다. 주인공 톰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스만 고집한다. 가끔은 택시나 지하철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워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버스가 톰에게 가장 익숙한 교통수단일 수 있다. 현실적인 추론들을 제외하고 보면 버스가 우리의 인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버스와 우리의 인생은 공통점이 많다. 버스가 노선 따라 다르듯이 인생의 시작점과 종착점도 각자 다르다. 순탄하게 달리는 버스가 있는가 하면 길이 막히는 버스도 있고 중간에 고장나는 버스도 있다. 가끔은 승객이 버스를 놓치기도 하고, 환승할 때도 있다. 우리도 인생을 버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싶다.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를 타면 되고,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수자를 묘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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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버스]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소수자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특이하게도 영화 속 선역은 소수자로 채워져 있다. 톰이 길거리를 헤매던 밤 다인종 부부가 집을 내어주고, 비를 맞으며 걷던 날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이 차 문을 열어준다. 거동이 불편한 톰에게 지팡이를 선물한 사람도 이민자 가정의 여성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하고, 관대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감독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1948년생의 질리스 맥키넌 감독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지금 사회를 좀먹는 혐오와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톰이 여정 내내 보여준 친절과 관용을 보다 많은 사람이 수용한다면 더 행복한 사회가 되리라고.

톰이 만들어낸 기적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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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관점에서 볼 때 [라스트 버스]는 아쉬운 점이 분명 있다. 이야기는 평면적이고, 군데군데 서사적 디테일이 누락됐다. 짐작은 가지만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이 의문을 남긴다. 할아버지가 SNS 스타가 된 것도 과정이 생략되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분량은 미미하지만 전개에서 빠질 수 없는 ‘#버스영웅’ 서사는 공동체라는 주제를 관철하기 위해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을 준다.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가 카페에서 젊은 여성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이유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젊을 적 아내가 떠올라 그랬을 것이라 넘겨짚을 뿐이다. 버스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할아버지의 어깨에 기대는 여자도 그렇다. 여자는 등장한 순간부터 고조된 감정을 표출하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위로할 뿐이다. 이처럼 관객이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장면이 꽤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톰이 목격한 빈곤, 세대 간 갈등, 차별과 배척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덮어두기만 한다면 오히려 부풀어 오를 것이다. 외면하지 말고 문제를 바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라스트 버스]와 같은 영화가 사회적 대화를 이끌어내 주기를 바라본다. 물론 당장은 어려울 수 있다.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국내에서 늘고 있지만, 그중 대중적으로 흥행한 작품은 손에 꼽는다. 그마저도 주로 저예산 영화로 제작되다 보니, 입소문을 타지 않는 한 대형 상업 영화에 밀리기 일쑤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도 조만간 변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라스트 버스]의 주인공이 겪는 일이 우리에게도 닥친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대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노인과 소수자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는 날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라스트 버스] 같은 영화가 늘기를 바란다. 현실 속 갈등을 조명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는 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기를 기대한다. 거기에 톰이 만들어낸 동화 같은 기적이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