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DC의 [플래시]가 기대와 우려 속에 베일을 벗었다. 앞서 DC는 [블랙 아담]에서 아톰 스매셔(노아 센티네오 분)와 사이클론(퀸테사 스윈델 분) 등 뉴페이스 히어로들을 선보였고, 이어서 [샤잠! 신들의 분노]에서 가족 친화적이고 미국스러운 분위기를 앞세워 관객 공략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연타석 헛스윙을 날린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팀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이벌로 꼽히는 마블도 최근 감을 잃었다는 지적을 받으며 예전만큼 관객을 동원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와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의 흥행 추이에서 잘 드러난다. 두 작품 모두 전작 대비 관객 수가 절반 이상 급감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 삼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전력에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다름 아닌 주연 배우 에즈라 밀러였다. 그는 폭행과 난동을 부리고 자택 침입과 미성년자 그루밍 논란에 휘말리며 지난 몇 년간 헤드라인을 뜨겁게 장식했다. 한두 번도 아닌 데다 그저 일탈이라 부를 수준을 넘어섰으니 대중이 그를 외면하는 것도 당연지사. 조연 배우였어도 위험할 판에 에즈라 밀러는 주인공, 심지어 1인 2역을 연기한다.

직전 DC 작품들의 흥행 실패에 에즈라 밀러 이슈까지. 사실 [플래시]는 스트리밍에서 공개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워너는 이미 촬영을 마친 [배트걸]을 폐기한 전적도 있다. 따라서 [플래시] 역시 조용히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공개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나오던 찰나,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플래시]의 내부 시사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는 뉴스다. 워너는 긍정적인 반응에 탄력을 받아 극장 개봉을 확정하고 [플래시]를 밀어주기 시작한다. 단 에즈라 밀러를 향한 여전히 싸늘한 시선에 홍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는 못했다.

이렇듯 [플래시]는 약점과 강점을 두루 갖춘 상태에서 꽤나 막중한 임무를 안고 개봉했다. 시들어버린 대중의 관심을 되살리고 향후 DC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는 것. 비록 [플래시]는 제임스 건이 워너에 합류하기 전에 기획됐으나 어쨌든 이제 그가 수장이 되었으므로 제임스 건의 능력을 가늠하는 첫 번째 잣대가 될 수도 있다. 과연 [플래시]는 헤매는 DC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 너무 빨라서 탈이 난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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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는 히어로 ‘플래시’의 시간 여행이 예상치 못한 여파를 불러오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플래시는 자신의 ‘스피드스터’ 능력을 사용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비극의 시발점이 된 엄마의 죽음을 막겠다고 결심한 플래시. 배트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사건 당일로 돌아간 플래시는 엄마의 죽음을 막는데 성공하지만 이내 충격적인 인물을 마주한다. 건들거리는 자세로 마당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철부지 대학생 배리 앨런, 즉 또 다른 자신이다. 이로써 플래시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 불시착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기에 이곳에는 원더우먼, 슈퍼맨 등 기존에 자신과 협력하던 메타 휴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설상가상 플래시는 배리 앨런이 스피드스터 능력을 얻는 과정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그런 와중에 조드 장군이 외계에서 침공해 지구를 위협한다. 결국 플래시는 지구를 구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나이 들고 은퇴한 배트맨과 지구 어딘가에 잠적한 슈퍼걸을 찾아 나선다.

이런 효자 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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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는 유쾌하고 짜릿하면서 또 감동적이다. 데뷔작부터 대표작 [그것]까지 필모를 공포영화로 채운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은 이번 영화를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이끌었다. 특히 초반부에 유머러스한 장면이 많이 포진됐는데 여기서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로 대중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일례로 초스피드 능력을 얻은 배리 앨런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날뛰다가 소란을 야기하는 장면은 잘 짜여진 코믹극을 연상시킨다. 나아가 플래시가 전기 방출, 물체 투과 등 다채로운 능력을 펼치는 장면들은 이색적인 볼거리를 선사한다.

한편 플래시의 가족 사랑은 뭉클한 감동을 건넨다. 애초에 플래시가 시간 여행을 시도한 이유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이유도 가족을 구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영화는 두 플래시의 티키타카와 외계 군대와의 전투에 중점을 맞추면서도 막판에 부모님을 향한 플래시의 사랑을 비추면서 진한 여운을 선물한다.

차고 넘치는 팬서비스! DC 캐릭터 총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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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에는 원년 DC 팬들이 반가워할 영웅들이 대거 등장한다. 원조 배트맨이자 역대 최고의 배트맨이라 불리는 마이클 키튼이 31년 만에 귀환해 플래시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활약한다. 여전히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노련미로 극을 단단히 받친다. 여기에 신예 사샤 카예가 슈퍼걸로 등장해 눈길을 끈다. 슈퍼맨의 사촌인 슈퍼걸로 분해 압도적인 전투력을 자랑한다. 특히 후반부 분노에 사로잡힌 슈퍼걸은 조드 장군의 군대를 격파하며 먼치킨의 면모를 선보인다.

다만 영화가 슈퍼걸을 활용한 방식이 아쉬움을 남긴다. 중반부에 모습을 드러낸 슈퍼걸은 비교 불가한 신체 능력을 보여주며 흥미와 기대를 자극했지만, 막상 그의 캐릭터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플래시의 성장 서사에 초점을 맞춘 관계로 슈퍼걸이 사이드킥에 머무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그 점을 고려하고도 슈퍼걸이 지나치게 도구로만 활용된 느낌이다. 대사가 적고 설명도 불충분하다. 빌런인 조드 장군도 마찬가지다. 이전 DC 영화와 코믹스를 즐겨본 관객이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조드 장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다. 그 역시 이야기 장치에 그친다는 느낌이 강하다.

득과 실로 작용하는 멀티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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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가 여러 배트맨과 1인 2역 플래시, 슈퍼걸 등을 등장시킬 수 있었던 건 멀티버스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멀티버스는 세계관을 확장해 이야기와 캐릭터의 범주를 넓힌다. 1989년 개봉한 [배트맨]의 마이클 키튼이 이번 영화에 플래시와 당당히 어깨를 견주는 비결이다. 단 멀티버스는 잘못 쓰이면 관객의 혼란을 가중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플래시]는 우리가 흔히 먹는 음식을 비유로 들어 시간선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복잡한 물리 이론을 내세우지 않고 쉬운 비유를 택한 건 효과적인 전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앞서 여러 작품들, 특히 MCU 작품들이 멀티버스를 실컷 사용한 탓에 기시감이 든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를 본 사람은 특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다. ‘또 멀티버스야?’하는 의문이 들며 이미 여기저기서 쓰인 이 소재가 반갑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래시의 눈부신 성장과 도약은 멀티버스이기에 가능했다. 과연 [플래시]가 멀티버스의 피로감을 뛰어넘고 관객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기대대로 섬광이 터진다면 관객은 궂은 일을 도맡던 히어로가 에이스로 거듭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쿠키 영상은 1개다. 유쾌한 분위기이며 또 다른 DC 히어로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