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올 거라는 소식이 들린다. 아쉽지만, 계획했던 여행을 잠시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신, 이 여름의 청량함을 담아낸 로드무비들을 감상하며 아쉬움을 달래는 것은 어떨까? 낭만적인 도시 한가운데부터 정겨운 시골 마을, 고즈넉한 서촌, 뻥 뚫린 도로 위까지, 떠날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하다. 그 속에서 로맨틱하고,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은 어떤 여정을 펼치는지, 그 즐거운 여정에 동행해 보자.

비포 선라이즈(1995)

이미지: THE 픽쳐스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 단 하루의 낭만적인 로맨스를 그린 영화 [비포 선라이즈]. 파리로 돌아가는 ‘셀린’(줄리 델피)과 비엔나로 향하는 ‘제시’(에단 호크)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빠져든다. 그림 같은 도시와 꿈같은 대화 속에서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지만, 점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이 짧은 하루는 두 사람을 아주 긴 여행으로 안내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는 ‘비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비엔나에서의 첫 만남을 그린다. 그 후 파리에서의 재회를 그린 [비포 선셋],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기회를 그린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진다. 첫 만남을 그린 [비포 선라이즈]는 여름의 뜨거움과 여행의 낭만을 완벽하게 녹여낸 로맨틱 로드무비이다. 이는 낯선 여행지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청춘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여기에 낮부터 밤, 일출 시간까지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멋스러운 풍경은 덤이다. 영화가 주는 편안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이끌리다 보면, 두려움을 이겨내면서까지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기쿠지로의 여름(1999)

이미지: (주)영화사 진진, (주)튜브엔터테인먼트

철없는 52세 아저씨와 걱정 많은 9세 소년의 유쾌한 여름 이야기를 그린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외롭게 여름방학을 맞이한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는 돈을 벌러 떠난 엄마를 찾기 위해, 그림일기장과 방학 숙제를 배낭에 넣고 엄마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이때, 친절한 이웃집 아줌마는 집에서 빈둥거리던 전직 야쿠자 남편 ‘기쿠지로’(기타노 타케시)를 아이의 보호자로 동행시킨다. 두 사람은 왕복 600km의 여정을 함께하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푸른 포스터가 인상적인 [기쿠지로의 여름]은 여름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다. 일본 가옥부터 시골 마을, 계곡, 수영장, 시장 등 다채로운 일본의 여름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기타노 다케시가 연출, 주연을 맡은 작품답게, 기타노 다케시만의 씁쓸하고 신랄한 ‘어른의 유머’가 인상적이다. 그래서 야쿠자, 갱단 등 험상궂은 인물들의 등장도 낯설지 않다. 여름을 닮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거친 어른들의 마음을 어떻게 녹이는지 지켜보자.

미스 리틀 선샤인(2006)

전 세계 최고의 콩가루 집안, 후버 가족의 무모한 여행을 그린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입만 열면 승리와 성공을 외쳐대는 가장 ‘리차드’(그렉 키니어), 이런 남편을 경멸하는 엄마 ‘쉐릴’(토니 콜렛), 약물과 포르노 중독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앨런 아킨),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는 아들 ‘드웨인’(폴 다노), 동성 애인에게 차이고 자살 기도에 실패해 후버 집안에 얹혀살게 된 ‘프랭크’(스티브 카렐)까지. 이 괴짜 가족은 꼬마 미인대회 ‘미스 리틀 선샤인’에 출전하려는 7살 막내딸 ‘올리브’(애비게일 브레슬린)의 소원을 위해, 온 가족이 낡은 고물 버스를 타고 1박2일 동안의 무모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어느 낙오자 가족의 희한한 여행길을 그린 [미스 리틀 선샤인]은 황당하고, 코믹한, 가슴 찡한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족 로드무비이다. 결코 융화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이들은 비밀과 갈등을 털어놓으며, 서로를 더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 중심에는 명랑한 막내딸 ‘올리브’가 있었고, 가족들은 올리브로 인해 처음으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낡은 노란색 고물 버스 안에서 일어나기에,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여정이 된다.

최악의 하루(2016)

이미지: CGV아트하우스

폭발 직전의 여름 로맨스를 그린 영화 [최악의 하루]. 늦여름 서촌의 어느 날,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는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이상하게 대화가 이어지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에게 길을 알려준다. 이후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친구 ‘현오’(권율)를 만나러 촬영지인 남산으로 향하고, 한때 은희와 잠깐 만났던 적 있는 남자 ‘운철’(이희준)은 은희를 찾아 남산으로 온다. 오늘 처음 본 남자, 지금 만나는 남자 그리고 전에 만났던 남자까지, 하루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 은희. 과연 이 하루의 끝은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김종관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최악의 하루]는 서울의 고즈넉한 풍경들을 포착한다. 한옥들이 즐비한 서촌의 골목길부터 초록으로 물든 남산, 노을이 지는 산책로까지, 서울의 늦여름은 복잡한 ‘은희’의 마음과 달리 매우 안녕하다. 그러나 은희의 마음은 그가 만난 세 남자처럼 혼란스럽고, 지루하고, 찌질하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는 보여지는 풍경과 숨겨진 마음의 모순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거라고,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이 하루의 끝이 과연 해피엔딩일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블루 아워(2019)

이미지: 오드 AUD

몸과 마음이 지친 당신을 위해, ‘그냥 눈 딱 감고, 떠나자!’라고 말하는 영화 [블루 아워]. 완벽하게 지친 CF 감독 ‘스나다'(카호)는 고향으로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자유로운 친구 ‘기요우라’(심은경)와 함께 당장 떠나기로 한다.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곳이지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하코타 유코 감독의 [블루 아워]는 일단 떠나고 보는 정직한 로드무비이다. 아무런 계획 없는 두 사람이 파란 자동차를 몰고, ‘무서울 것 없는 꿈의 나라’를 찾아 떠난다.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잠시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동행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려주기 위함이다. 몸과 마음이 지친 이들에게, 한여름날의 축제 같은 시간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