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17일,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대한민국 헌법이 최초로 공포되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개개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정치이념이 배경이 된다. 아래 5편의 영화는 복잡하고 치열한 법의 세계를 그린다. 더불어 법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법이 정말 인간을 보호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대한민국 5대 국경일인 제헌절을 기념하며, 영화를 통해 헌법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2007)

이미지: 도호, ㈜서울엠피필름

면접을 위해 만원 전철에 타고 있던 텟페이는 앞에 있던 고교생을 성추행한 치한으로 몰린다. 변호사의 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는 텟페이는 끝까지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항변한다. 하지만 일본의 사법 관례상 형사재판에 기소될 경우, 유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99.9%이다. 그럼에도 텟페이는 자신을 믿어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년에 걸친 긴 재판을 거친다. 10번의 공판, 시종일관 담담하고 침착하게 무죄를 주장한 텟페이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을까?

​일본 사법 제도의 모순을 정면에서 파헤친 정통 법정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무죄의 근거가 충분히 있음에도 판사가 무죄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은 일본 사법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더불어 사회 질서 유지의 수단인 ‘재판’이 증거와 법률에 의거해, 객관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셀 위 댄스](1996)의 감독 수오 마사유키가 11년 만에 선보인 작품으로, 일본 대표 배우 카세 료와 야쿠쇼 코지가 주연을 맡았다. 특히 열연을 펼친 카세 료는 이 영화를 통해 각종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유 돈 노우 잭] (2010)

이미지: HBO

불치병 환자 130명의 안락사를 도우며 ‘죽음의 의사’로 불린 잭 케보키언의 실화를 그린 전기 영화 [유 돈 노우 잭]. 우리가 죽고 사는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고집스럽고 비극적인 주장을 갖고 있었던 한 남자의 실화다. 고통에 시달리는 불치병 환자의 마지막을 도운 죽음의 의사이자 안락사 옹호론자인 잭 케보디언 박사는 자비의 천사일까, 그저 살인자일까? 

​여전히 논란이 되는 존엄사, 안락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열정적인 믿음을 가진 잭 케보키언은 현대 미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인물들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는 결국 2급 살인죄로 25년 형을 선고받았었지만, 현재 세계 곳곳에서는 존엄사에 대한 제도가 서서히 법제화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유 돈 노우 잭]은 각자의 생명 윤리와 존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한다. 영화에서 잭 역할을 맡은 알 파치노는 눈을 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줬고, 69세의 나이로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부러진 화살] (2011)

이미지: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수학 교수 김경호 교수는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한 뒤 부당하게 해고된다. 이후 부당 해고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 판결을 받고, 석궁을 쐈다는 혐의까지 쓰며 ‘테러’ 사건의 피의자가 된다. 하지만 그는 한치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고, 법정에서 선처를 호소하기는커녕 법대로 판결하지 않는다고 판사들을 꾸짖기 시작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에서 진술은 계속해서 엇갈리고, 결정적인 증거 ‘부러진 화살’은 행방이 묘연하다. 비타협 원칙을 고수하며 재판장에게도 독설을 서슴지 않는 김경호의 ‘원칙’은 승리할 수 있을까?

​상식 없는 세상에 원칙으로 맞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부러진 화살]은 200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석궁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기득권층을 보호하려는 집단의 폐해를 꼬집으며, 사회 비판적 주제의식까지 담아냈다. 우리 사회의 상식과 원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정지영 감독의 문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작품상과 청룡영화상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안성기는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완고한 캐릭터 김경호를 연기했고, 배우 본연의 이미지와 잘 어우러졌다는 평을 받으며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가버나움] (2018)

이미지: Gaumont Distribution, Sony Pictures Classics, 그린나래미디어, 플레이리스트

신분증도 없고, 출생증명서도 없어서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12살 소년 자인은 칼로 사람을 찔러 교도소에 갇히고, 이내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판사가 법정에 선 자인에게 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지 묻자 자인은 대답한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게 그들이니까요.’

​[가버나움]은 아이가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파격적인 법정 영화로 보이지만, 사실 희망 없는 도시의 빈민을 다루고 있다. 배경이 되는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으로, 예수가 머물며 몇 번의 기적을 일으켰지만 주민들이 회개하지 않아 멸망하게 된 곳이다. 결국 그곳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아이들이라는, 비극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리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실제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던 10세 소년과 거리에서 껌을 팔던 시리아 난민 출신 소녀를 캐스팅하였다. 이들은 실제로도 자신의 존재를 합법적으로 증명할 서류가 없었기에, 영화제에 참석하기까지 지난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안티고네] (2019)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키다리이엔티

캐나다 몬트리올에 정착한 이민자 가족의 막내 안티고네에게 비극이 벌어진다. 두 오빠 중 하나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하나는 그 자리에서 구속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고 싶은 안티고네는 오빠 대신 감옥에 들어가고, 용기 있는 그의 행동을 본 대중들은 안티고네를 SNS 영웅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21세기 ‘안티고네’의 탄생을 그린 [안티고네]는 전 세계적 화두인 난민 문제에서 출발한다. 2008년 몬트리올 공원에서 경찰의 부적절한 개입에 의해 한 이민자가 사망하고, 이 뉴스를 접한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신화 속 절대 권력으로 표현되는 크레온 왕을 현대의 사법제도로 묘사했다. 혈연과 국가, 법정과 미디어, 희생과 부조리가 뒤엉키는 가운데 우리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