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역할을 반복적으로 맡는 배우들이 있다. 이들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머릿속에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작품 선택도 수월해진다. 오늘은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같은 존재, 윌 페렐을 소개한다. SNL 출신으로 30년간 꾸준히 웃음을 전달하며 코믹 역할의 정점에 오른 배우다. 마침 그가 [바비]로 올여름 극장가를 찾아오는 바, 윌 페렐의 극장 귀환을 기념하여 그의 출연작 5편을 소개한다.

쥬랜더(2001) ─ 무가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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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스틸러가 출연과 제작, 연출을 맡은 영화 [쥬랜더]는 모델에서 암살자가 된 데릭 쥬랜더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때 세계 최정상 모델이었지만 국민 비호감으로 전락한 쥬랜더. 재기를 위해 패션계의 거물 디자이너 무가투와 손을 잡는다. 하지만 사실 무가투는 말레이시아 수상을 제거하기 위해 쥬랜더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세뇌를 통해 쥬랜더를 암살자로 만든다. 결전의 날, 무가투의 패션쇼에서 준비된 음악이 흐르자 세뇌당한 쥬랜더는 수상에게 돌진한다.

시놉시스를 보면 황당무계하게만 느껴지지만, [쥬랜더]는 패션 업계를 유쾌하게 풍자했다는 호평과 함께 제작비의 2배 이상의 수입을 거두었다. 작중 윌 페렐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악역 무가투 역을 맡아 벤 스틸러와 함께 극을 이끈다. 양털같이 하얗고 곱슬거리는 헤어 스타일과 강렬하고 저돌적인 의상, 그리고 품에 푸들을 껴안고 다니는 역할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면서 다시금 영화의 장르를 상기시킨다. 참고로 코미디라는 공통점을 가진 둘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벤 스틸러는 후술할 [영광의 날]에 제작자로 참여했고, 둘은 15년 후 속편 [쥬랜더 리턴즈]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엘프(2004) ─ 버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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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페렐은 가족 영화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증명했다. 영화 [엘프]는 인간이지만 엘프로 자란 ‘버디’의 이야기다. 우연히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보따리 안에 기어들어간 뒤 그대로 엘프 세계에서 자란 버디. 한 번도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버디는 친아빠를 찾아 현실 세계에 입성하지만 냉담한 반응을 마주한다. 이에 버디는 굴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크리스마스를 선물하려 노력한다.

[엘프]는 윌 페렐의 필모에서 보기 드문 전체관람가 영화다. 작중 그는 몸은 크지만 마음은 순수한 버디 역을 맡아 천진난만한 매력을 발산한다. 전작과는 180도 다른 모습에 괴리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보다 보면 버디의 순수함에 동화될 것이다. 성공과 돈이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는 요즘 시대에 가족과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엘프]는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최적화된 영화다. 미국에서 2023년 연말에 개봉한 [엘프]는 개봉 첫 주 [매트릭스 3]에 밀려 2위를 차지하지만, 오히려 2주 차에 1위를 차지, 이후 뒷심을 보여주며 20주간 박스오피스 10위권에 랭크됐다. 그 결과 [엘프]는 당해 북미 흥행 순위 7위에 오르며 명실상부 크리스마스 영화로 등극했다.

블레이즈 오브 글로리 (2007) ─ 채즈 마이클 마이클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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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원지간인 두 명의 남성 피겨 스케이터가 듀엣에 도전하는 스포츠 코미디 영화 [영광의 날]. 자라온 환경뿐 아니라 외양과 성격도 극과 극으로 다른 지미 맥엘로이와 채즈 마이클 마이클스. 둘의 공통점은 뛰어난 스케이팅 실력과 넘치는 자기애뿐이다. 그런 둘이 사상 최초로 공동 금메달을 시상하는 일이 벌어지자,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고 싸움으로 이어진다. 결과는 메달과 출전 자격 영구 박탈. 그렇게 3년 반이 흐르고, 방황하던 이들에게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바로 남성-남성 듀엣 팀을 구성하여 출전하는 것! 둘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접어두고 전대미문의 도전에 나선다.

[영광의 날]은 남성X남성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을 앞세웠지만, 그렇기에 맘껏 웃으며 볼 수 있다. 윌 페렐이 맡은 채즈 마이클 마이클스는 밑바닥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올라온 인물로, 거친 야생마 같은 매력으로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옴므파탈이라는 설정에 걸맞게 윌 페렐은 자신의 끼를 한껏 발산하며 더티 섹시의 정수를 과감 없이 보여준다. 여기에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 [벤치워머스] 등 윌 페렐과 마찬가지로 여러 코미디 영화에 출연한 존 헤더가 같이 티키타카를 선보이며 재미를 극대화한다.

인턴쉽(2013) ─ 케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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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방식이 익숙한 두 중년 남성이 세계적인 IT 기업 구글의 문을 두드리는 영화 [인턴쉽]. 시계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던 빌리와 닉은 업계의 쇠퇴에 결국 정리해고된다. 둘은 곧장 이것저것 시도하지만 영 시원찮은 결과물만 마주한다. 그러다 이들은 마감을 하루 앞둔 구글 인턴쉽을 발견하고, 약간의 편법을 동원해 지원에 성공한다. 기적적으로 합격한 빌과 닉은 천재 학부생들과 함께 인턴쉽을 수행한다. 초반에 외면받던 둘은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기른 눈치와 자신감을 발휘해 점차 회사에서 존재감을 키워 나간다.

[인턴쉽]은 너무 무겁지 않은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나 출연 크레딧에 윌 페렐은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가 특별 출연했기 때문이다. 윌 페렐은 밉상 캐릭터를 누구보다 차지게 소화하며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극중 윌 페렐은 매트리스 매장의 직원인 케빈으로 등장한다. 아리따운 여성 손님에게는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은 손님에게는 한없이 매정한 이중인격의 소유자로,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온 닉을 하대하며 결국 그가 구글 인턴쉽에 지원하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한다.

크리스마스 스피릿(2022) ─ 유령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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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뮤지컬 영화로 [크리스마스 스피릿]은 은퇴를 앞둔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인간 클린트 브릭스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현재 크리스마스 유령은 과거와 미래 유령이 학을 떼고 포기한 클린트를 담당하기로 한다. 약 200년 동안 영혼 구원에 힘써왔다며 자신만만하게 구제에 나선 현재 유령. 인간 세계에 내려와 클린트를 쫓아다니며 그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엘프] 윌 페렐과 [데드풀] 라이언 레이놀즈의 조합으로 화제를 모은 [크리스마스 스피릿]. 라이언 레이놀즈는 성공한 미디어 컨설턴트 클린트 역을 맡아 유아독존의 면모를 보여주며, 윌 페렐은 그를 반성하게 만드려는 현재 유령 역을 맡았다. 이제껏 해온 엉뚱하거나 익살스러운 역할과 다르게 착한 역할이기에 오히려 더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리스마스 스피릿]은 오리지널 주제곡과 발랄한 안무, 유쾌한 슬랩스틱 개그를 선보이며 윌 페렐의 필모에 [엘프]에 이은 또 다른 크리스마스 영화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