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인 시대를 살고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혼자의 삶을 택한 이들의 일상은 소박하지만 안락하고, 고요하지만 편안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던 시끌벅적한 일상은 아니더라도 작고 사소한 기쁨들이 있다. 아래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독일의 허름한 아파트부터 이름 모를 무인도, 단조로운 영국 마을, 내일 없는 서울, 보통의 일본까지. 그 어디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주인공들과 함께, 오늘도 씩씩하게 혼자의 삶을 가꾸어 나가본다.

[파니 핑크] (1994)

이미지: 코브라 필름 GmbH

공항 검색원으로 일하며 허름한 아파트에 입주해 사는 29세 여성 ‘파니 핑크’는 여전히 운명을 믿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심령술사이자 게이 클럽의 가수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운명의 남자를 예언해 준다. 파니는 그 예언에 따라 ‘23’이라는 징표를 가진 남자를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아침 출근길에 마주친 번호판 ‘2323’의 검은 재규어 차량으로 돌진한다. 과연 그 남자는 파니 핑크의 운명적인 남자가 맞는 걸까?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사랑에 실패하였으며, 그래서 지루한 인생을 버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운명과 주술 같은 방식으로 현실을 도피하던 그가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라며 진솔한 고백을 내뱉을 때는 씁쓸하다. 그렇기에, 오직 타인의 사랑을 위해 살아온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여정은 더욱 흐뭇하다. 도리스 도리 감독의 날카롭고 재치 있는 통찰이 빛나는 작품이다. 펑키스타일에 블루, 블랙, 옐로우의 영상미가 신비롭게 펼쳐지는 매우 독특한 컬트 페미니즘 영화로, 독일 영화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겐 참신하고 경이로운 체험이 될 것이다.

[캐스트 어웨이] (2000)

이미지: 20세기 폭스, 드림웍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간에 얽매여 살아가는 남자 ‘척 놀랜드’(톰 행크스)는 연인 캘리와 만나지도 못할 만큼 바쁘게 지낸다. 크리스마스이브, 데이트 중 급히 호출된 척은 비행기 착륙 사고를 당하고, 정신을 잃은 후 무인도에서 눈을 뜬다. 생존을 위해 이전의 모든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캘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4년 후 어느 날, 떠내려온 판자 하나를 이용해 섬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안해낸 척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을 이용하여 뗏목을 만든다. 섬에 표류한 지 4년 만에 거친 파도를 헤치고 탈출을 감행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의 무인도 표류기를 그린 [캐스트 어웨이]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로 불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내일을 살아가기로 결정한 주인공은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도 붙여주고, 불도 만들어내고, 코코넛 쪼개는 방법도 터득한다. 섬을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새로운 삶의 목적까지 부여한다. 영화는 ‘시간이 곧 금’이라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쁘게 살아가나요?’라는 물음을 던졌고, 톰 행크스의 애처롭고 위대한 인간 승리는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스틸 라이프] (2014)

이미지: ㈜드림웨스트픽쳐스

런던 구청 소속의 22년차 공무원 ‘존 메이’는 홀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고, 잊혀진 의뢰인의 유품을 단서 삼아 아무도 듣지 못할 추도문을 작성한다. 매일 홀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어느 날, 이웃 ‘빌리 스토크’가 죽은 채 발견된다. 같은 날, 정리해고를 통보받은 존은 자신의 마지막 의뢰인인 ‘빌리 스토크’를 위해, 처음으로 사무실에서 벗어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의 삶을 뒤쫓기 시작한다. 비록 알코올중독자로 홀로 생을 마감했지만 풍부한 역사를 가졌던 빌리 스토크의 인생은 단조롭던 존의 일상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사랑과 상실, 기억, 해원, 사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스틸 라이프]. 매너리즘에 빠진 채 철저히 혼자의 삶을 살던 존은 죽음과 직면한 일을 수행하며 숭고한 깨달음을 얻는다. 수고스러운 희생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이 여정에서 존은 혼자라면 몰랐을 삶의 의미와 온기를 터득하게 된다. 영화는 사회적 고립과 소외, 고독사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당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죽음의 순간에는 누군가와 함께여야 한다’는 인간적인 철학을 제시한다.

[소공녀] (2018)

이미지: CGV 아트하우스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이솜)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새해가 되자 어김없이 집세는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오른다. 일당만이 여전히 그대로인 미소는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는 세상에서 과감히 ‘집’을 포기하고, 자발적 홈리스 생활을 시작한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도시 하루살이를 그린 [소공녀].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는 캐릭터 미소는 소확행, N포 세대, 플라시보 소비 등의 단어와 가까운 2030 세대를 극단적으로 대변한다. 거대한 도시에서 그들이 왜 집을 포기하는지, 왜 결혼과 연애마저 포기하며 ‘혼자’를 택하는지, 앞으로 또 어떤 것들을 포기하게 될지, 지금 가장 필요한 고민들을 함께 나누려는 작품이다.

[보통의 카스미] (2023)

이미지: ㈜비싸이드픽쳐스

‘카스미’는 첼로를 전공했지만 현재는 전공과 다른 일을 하며, 서툴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연애나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혼자 사는 것이 쓸쓸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게 나인 걸 어떡해?’라며 자기 자신을 온전히 긍정할 뿐이다.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 [보통의 카스미].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며 성장하는 무성애자, 할 말은 다 하는 전 AV 배우, 동료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게이, 백수로 사는 아버지 등 다양한 캐릭터들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모두가 ‘로맨스와 동화 속 왕자’를 외칠 때, 당당히 혼자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LOVE MYSELF’를 외치는 카스미는 비혼을 넘어 비연애로 향하는 요즘 세대들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정답만을 제시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에게 힘을 보태는 인물들을 보면 통쾌함과 용기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