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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개봉한 박해일, 김혜수, 김남길 주연의 영화 [모던보이]는 [해피 엔드], [사랑니], [은교] 등 작품성 높은 영화들을 연출한 정지우 감독의 작품이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신문물에 빠진 청년이 의문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며 독립투사로 변모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이해명’은 당대 최고 모던보이로 통하던 시인 ‘백석’의 외형을 모티브로 했다. 훤칠한 외모와 댄디한 옷차림,독특한 헤어스타일 등 외적인 모습과 비상한 두뇌까지, 백석 시인과 많이 닮아 있다. 불멸의 사랑시를 남긴 로맨티스트라는 점까지 말이다. 영화는 모던보이의 멋스러운 스타일뿐만 아니라 1930년대 랜드마크인 경성역, 명동성당, 경성 거리 등을 완벽하게 구현하여 기술상, 조명상, 미술상까지 수상하였다. 광복절을 기념하며, 역사적 의미와 볼거리가 모두 담긴 [모던보이]를 자세히 살펴본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는 기발하고도 코믹한 연애 소설이다. 다만, 사명감을 가진 독립투사들의 이야기가 아닌 당대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조명한 작품이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독립’이라는 키워드가 더욱 짙게 녹아 있다. 당대 젊은이들의 취향과 일상을 반영하면서도 평범했던 이들이 어떻게 독립투사가 되어가는지를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매혹적이고도 로맨틱한 웰메이드 시대극을 완성했다.

[모던보이]의 이야기는 1930년대 경성에서 시작된다. 모던보이 혹은 문제적 청년 해명은 조선총독부의 1급 서기이다. 중일 전쟁이 발발해 세상이 시끄럽지만 해명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 관심이 없다. 아침은 토스트와 커피로 시작하고, 경성역을 거닐며 여인들의 환호를 즐기며, 저녁이면 일본인 친구와 함께 무도회를 즐긴다. 그리고 어느 날, 무대 위에서 매혹적인 공연을 펼치는 미스터리한 여인 ‘로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로라는 비밀리에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난실’이었고, 해명이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난실을 포기하지 못한다. 자칭 ‘낭만의 화신’ 해명은 결국 사랑하는 난실을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하며, 독립투사의 역할까지 자처하게 된다.

모던보이와 힙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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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할 것만 같던 일제강점기 경성에도 흥과 멋이 숨쉬는 문화들이 존재했고, 그 중심에는 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있었다. 모던걸, 모던보이는 1920년대 조선에서 근대적 생활 양식을 앞서서 받아들인 일단의 무리를 속되게 지칭하던 표현이다. 당대의 문화적 변화를 상징하며, 자신만의 멋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힙스터’와 유사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근대와 과학의 힘을 적용시킨 일본의 화려한 신문물에 빠르게 현혹되었고, ‘식민지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고 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는 낯선 풍경은 위화감을 형성하기 충분했다. 또한 근대적 삶의 양식을 보여 주는 긍정적 인간상이 아닌, 퇴폐적이고 불량한 인강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극중 해명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해명의 마음속에는 사실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자기 스스로를 ‘친일파 뺀질이’로 일컫는다고 한들, 그런 자신에게 죄책감과 자괴감이 들 리는 만무하다. 그렇게 한낱 우월감에 사로잡혔겠으나, 역사의식에 무감각하고 자아가 불투명한 젊은이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길을 잃은 존재일 뿐이다. 모던보이와 모던걸, 어쩌면 지금의 힙스터들까지. 새롭고 매혹적인 것들의 내막은 생각보다 서글프다.

​만약 누군가 진정으로 그의 정체성을 세워 준다면, 그는 무의미한 모던보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까? 해명의 대답은 ‘그렇다’였고, 그 방식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쾌락이 곧 사랑이라고 여겼던 모던보이가 그보다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유치하다고 비웃어도 그를 말릴 수 없다. 그러나 10개도 넘는 신분을 가진 독립운동가 난실과 자신의 정체성에 무관심한 해명은 아주 다른 인물이라서, 빠르게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어느 한 사람이 상대에게 매몰되는 수밖에 없다. 이때 ‘낭만의 화신’ 해명은 난실에게 기꺼이 매몰되기로 결심하고, 모던보이에게는 없을 것만 같던 미련할 정도의 ‘순정’을 보여준다.

낭만의 화신에서 독립의 화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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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의 그 어떤 행동 중에서도,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버리는 모습이 가장 ‘모던보이’스러웠다. 원작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사랑의 추억에 갇힌 우스꽝스러운 영혼’으로 소개된다. 극중에서도 모든 여인들에게 환호를 받아 마땅한 모던보이 해명은 사랑에 깊게 빠질수록 점점 체면이 구겨진다. 특히, 극의 말미에서 작은 태극기를 펄럭이며 어설프게 ‘만세’를 외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영혼’ 그 자체이다. 아마 난실이 떠나가고 세월이 흐른 후, 진정한 독립운동가가 된 것도 그저 사랑의 추억에 갇혔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리석은 사랑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일까, 아니면 제대로 뜨게 한 것일까? [모던보이]를 성장영화로 보여지게 하는 엔딩 장면이 그 답을 대신한다. “당신의 꿈도 독립이지?”라고 묻는 난실 앞에서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해명은 어렵게 “응”이라고 답한다. 나는 지금 몹시 두렵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태어나는 눈빛이었다. 난실에게는 수단이었던 그것이 해명에게는 인생과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쾌락만을 추구하던 모던보이가 한 여인의 사랑을 쟁취하려 했을 때, 그것이 조국을 위한 낭만으로 확장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난실에게 “나는 꽤 낭만적인 남자야”라는 말을 내뱉을 때만 해도, 그의 말은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허풍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시작이 객기든 낭만이든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도화선이 되었든, 결국 깨닫고 나아가면 되는 일이다. 숭고한 사명감만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님을, 누구보다 어리석고 뜨거웠던 해명은 몸소 증명했다. 당시 힘없는 국가가 알려주지 못했고, 안락함에 길들여진 개인들이 외면했던 독립의 이유를 예상치 못하게 사랑이 알려주고 떠났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 모던보이의 시선에서, 자유와 독립은 사랑이 남긴 셀 수 없는 유산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