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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공개된 [베니와 준]은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과 에이단 퀸, 그리고 조니 뎁의 개성과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영화이다.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를 거부한 이 영화는 몬트리올 출신 감독 제레미 체칙의 손에서 탄생했다. 연극과 그림을 사랑한 제레미 체칙은 70년대 후반에 이태리 VOGUE의 패션 사진가로, 80년대 전반엔 미국 CF 감독으로 활약했다. 이후 1993년, 영화감독으로서 [베니와 준]을 내놓으며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감독의 자유롭고 감각적인 감성은 영화 전반에 고스란히 녹여졌는데, 특히 영화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OST와 일상적인 소품을 독특하게 활용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예쁘고 순수한 정서를 잘 담아냈다는 점에서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남매와 한 청년이다. 정신 질환이 있는 화가 ‘준’(매리 스튜어트 매터슨)은 예술적인 광기와 파도처럼 몰아치는 감정들을 캔버스에 쏟아낸다. 그의 오빠 ‘베니’(에이단 퀸)는 이 험한 세상에서 동생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렇게 각별한 남매 앞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엉뚱한 청년 ‘샘’(조니 뎁)이 나타난다. 그가 보여주는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동작들은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하고,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는 차세대 버스터 키튼 같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샘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베니와 준에게 다가간다. 준을 보살피느라 자기만의 인생을 살지 못하던 베니는 삶의 여유를, 작은 세상이 전부였던 준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샘이 선사하는 소소한 웃음은 이내 치유로 번지고, 남매는 새로운 삶의 전환을 맞이한다.

남매의 작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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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시리얼을 먹는 것이 전부인 준은 때때로 오빠 베니에게 전화를 걸어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알갱이가 씹히는 땅콩버터와 두 가지 종류의 젤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베니는 준의 사소한 요구들을 모두 들어준다. 베니에게 준은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를 염려스럽게 여긴 준의 상담의는 준이 그룹 홈 시설에 들어가길 권유한다. 더 정확히는, 오빠 베니와 떨어지기를 권유한다. 하지만 가족이라고는 둘뿐인 남매는 떨어질 생각이 없다. 게다가 또래를 좋아하지 않는 준은 시설에서 이틀 만에 나온 전력도 있다. 심한 감정 기복과 불안 증세를 가진 준은 결코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베니 또한 지금 준의 상태를 최선이라고 여기며, 오로지 현재를 유지하고자 한다.

사실 베니와 준 남매에게는 오래된 트라우마가 있다. 어릴 적 부모의 사고를 목격한 기억과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것이다.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에서 베니의 깊은 죄의식을 느낄 수 있다. 베니보다 어리고 유난히 여린 준은 아직까지 그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같은 상처를 가졌지만 오빠인 베니는 잃어버린 부모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 베니에게도 자신의 삶이 필요하다. 현재의 삶을 얽힌 실타래 같다고 여기는 베니는 준을 위해 모든 것을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도 일상의 여유가 필요하고, 친구들처럼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고, 여자와 데이트를 하며 설레고도 싶다. 15분마다 집에 전화해 준의 안부를 묻는 일상을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금붕어도 못 키우는 내가 준을 잘 보살필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문제에도 직면한다. 그동안 베니는 안전하고 작은 세상에서 준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 작은 세상에 어떤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상하고 특별한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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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안하고도 평화로운 남매의 일상이 반복되는 어느 날, 준은 높은 나무 위에 올라앉은 남자를 발견한다. 이상한 남자라고만 여긴 그의 이름은 샘이며, 어쩌다 보니 남매의 집에서 함게 살게 된다. 베니는 샘에게 준의 정신질환을 알리고, 몇 가지 주의할 것들을 알려준다. 그림 그릴 때는 방에 들어가지 말 것, 변덕스럽게 굴더라도 신경 쓰지 말 것, 혼잣말에는 대꾸하지 말 것, 준과 아무 짓도 하지 말 것. 그러니까, 지금처럼 그냥 하던 대로 하게 놔두라는 말이다. 베니는 지금과 같은 일상이 준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샘은 베니의 모든 주의사항들도 무시하고, 남매의 일상에 균열을 만들어 버린다. 남매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샘이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샘은 빵 한 조각도 예사롭지 않게 먹고, 늘 엉뚱하고 이상한 장난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자신의 구멍 뚫린 양말보다 더 초췌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며, 자신이 찰리 채플린이라도 된듯 일인극을 펼치기도 한다.

베니는 예사롭지 않은 샘의 등장에 골이 아프지만, 준은 그가 썩 마음에 든다. 준과 샘은 알갱이가 가득 씹히는 라떼, 다리미로 구운 치즈토스트, 라켓으로 으깬 감자, 생명력을 빼앗긴 건포도를 공유한다. ‘건포도 위원회에 반대표를 던지겠다’는 준의 엉뚱한 말들이 샘에게는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서로의 물감 묻은 손을 잡으며 수줍게 입을 맞춘다. 샘은 자신의 특별한 재능으로, 준의 불안과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일상을 희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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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와 준]은 일상을 희극으로 만드는 마법을 보여준다.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들의 삶을 비극이라 여기며, 공허한 일상만을 보내던 남매는 준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한다. 폐쇄병동에 입원해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준은 창밖에 매달린 샘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린다. 베니는 이제야 인생의 실타래가 좀 풀렸다며, 좋아하는 여자에게 처음으로 꽃을 건넨다. 그렇게 남매는 이상하고 독특하지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샘에게 스며들었고, 답답했던 일상은 어느덧 환기가 되었다.

영화의 수많은 장점 중에서도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조니 뎁의 빛나는 재능이다. 조니 뎁은 우울한 눈빛으로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선보이며, 일상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했다. 특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에 올라탄 첫 등장부터 고층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인사를 건네는 마지막 모습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다. 특별한 서사도, 장황한 대사도 없지만 그의 존재감만은 명확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베니와 준이지만, 그들을 변화시킨 샘이야말로 진짜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