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손이앤에이

배우 임수정은 여린 얼굴로 파도 같은 감정들을 쏟아낸다. 가만히 있는 얼굴은 건조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그 얼굴 뒤로 언제 파도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앳된 마스크와 상반되는 짙은 내면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 임수정의 반전 매력이다.

임수정은 2023년 9월 개봉하는 영화 [거미집]을 통해 김지운 감독과 20년 만에 재회하였고, 처음으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까지 밟게 되었다. 이후 공개될 영화 [싱글 인 서울]에서는 이동욱과도 재회하여 로맨스를 펼친다. 예능 출연을 전혀 하지 않는 배우이기에 임수정의 신작 소식은 더욱 반갑다. 신작에서는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하며, 임수정의 반전이 돋보이는 필모그래피를 살펴본다.

[장화, 홍련] (2003) / 배수미 역

영화사 청어람

어른도, 아이도 아닌 두 자매의 이야기를 그리 공포 스릴러 영화 [장화, 홍련].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서려 있는 집, 아름답지만 신경이 예민한 새엄마 ‘은주’(염정아)가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자매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을 반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은주를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한 첫날, 집안 곳곳에서 괴이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며 가족의 괴담이 시작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에서 앳된 얼굴의 임수정은 묘하고 서늘한 연기를 선보였다. 김지운 감독은 자기 세계가 명확하면서도 어딘가 폐쇄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임수정을 캐스팅했다. 임수정 또한 원래 자신이 ‘수미’에 가까웠다고 밝혔다. 차갑고 어둡고 건조하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표정도 없다고. 이제는 차가움보다 따뜻함에 가까운 배우가 되었지만, 어딘가 긴장되고 갇혀져 있던 그 시절의 임수정은 수미 그 자체였다. 이 작품으로, 만장일치 평가를 받은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다수의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각설탕] (2006) / 김시은 역

CJ ENM MOVIE

최고의 기수가 되고 싶은 소녀와 그를 위해 달리고 싶은 말이 함께 꿈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각설탕]. 목장 소녀 ‘시은’(임수정)은 단짝 같던 말 천둥이와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다. 2년 후, 여자 기수를 꿈꾸는 시은은 우연히 천둥이와 재회하고, 기수와 경주마로서 경마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과연 둘은 수만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마지막 경주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임수정은 차기작으로 여배우건 남배우건 기피하던 동물 영화를 선택했다. 국내 최초로 사람과 동물 간의 애틋한 우정을 그린 영화 [각설탕]에서 임수정은 산뜻한 짧은 머리로 변신한 후 밝고 순수한 매력을 뽐낸다. 가장 많은 장면을 함께 출연하는 말 천둥이와도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며, 스크린 유망주로서 새로운 도약에 성공한다.

[김종욱 찾기] (2010) / 서지우 역

CJ ENM MOVIE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 [김종욱 찾기]. 고지식함 때문에 회사에서 잘린 한기준’(공유)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첫사랑 찾기 사무소’를 창업한다. 뮤지컬 무대 감독 ‘서지우’(임수정)는 첫사랑 ‘김종욱’을 잊지 못해서 남자친구의 프로포즈를 거절한다. 두 사람은 기억조차 희미한 첫사랑의 이름 석 자만을 가지고, 전국의 김종욱들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김종욱 찾기]에서 임수정은 파격적인 ‘욕 연기’에 도전했다. 극중 털털한 뮤지컬 감독 지우는 거침없는 말투와 행동을 선보이는 인물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이미지의 임수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임수정은 자신의 방식대로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공유와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화려한 춤과 노래까지 선보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열정적인 무대 감독에서 섹시하고 파워풀한 뮤지컬 히어로로 변신하는 모습이 관전 포인트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 (2012) / 연정인 역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사랑보다 어려운 결별에 관한 이야기기를 유쾌하게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소심한 남편 ‘두현’(이선균)은 남들에겐 완벽해 보이지만, 입만 열면 독기 어린 바른 말을 쏟아내는 아내 ‘정인’(임수정)과의 이혼을 결심한다. 아내가 무서워 말도 꺼내지 못하는 두현은 아내가 먼저 자신을 떠나게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어떤 행동에도 정인은 눈을 까딱하지 않고, 두현은 전설의 카사노바 ‘성기’(류승룡)에게 정인을 유혹해달라고 부탁한다.

민규동 감독의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임수정은 ‘최악의 아내’로 변신했다. 남편에게만 최악인 정인은 입만 열면 독설을 퍼붓고, 물불 안 가리는 성격 탓에 창피하고 피곤한 인물이다. 임수정은 평소 목소리보다 톤을 높여 연기하며, 까칠하고도 통통 튀는 매력을 극대화했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동시에 확실한 철학과 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당당한 여성상이었다. 이 작품으로 임수정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당신의 부탁] (2018) / 효진 역

CGV 아트하우스

각자 다른 상실을 겪은 두 사람이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당신의 부탁]. 2년 전, 사고로 남편을 잃은 32살 ‘효진’(임수정)은 절친한 친구 ‘미란’(이상희)과 동네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며 혼자 살아간다. 어느 날,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효진 앞에 죽은 남편의 아들인 16살 ‘종욱’(윤찬영)이 나타난다. 오갈 데가 없어진 종욱은 효진에게 엄마가 되어달라는 당황스러운 부탁을 하고, 효진은 고민 끝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종욱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저예산 영화 [당신의 부탁]에서 임수정은 연기 인생 처음으로 어머니를 연기했다. 이전 작품들보다 한층 자연스럽고 차분해진 모습이었고, 감정 또한 능숙하고 안정적으로 다루며 극을 탄탄하게 이끌어간다. 특히, 사고로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소년을 갑자기 떠맡게 된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을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해냈다. 엄마의 전형성을 깨부수는 동시에, 임수정의 고요하고 깊이 있는 내면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