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룩스

최근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멤버 노엘 갤러거가 내한 공연을 가졌다. 한국 관객들은 여느 때처럼 최고의 호응을 보였고, 노엘 갤러거 또한 잊지 못할 공연을 보여주었다. 이후 한국에서 진행한 뉴스 인터뷰가 인상적인데, 노엘 갤러거는 “내 노래는 나 없이도 영원히 살 겁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자신에게 ‘내일이 끝이야, 앞으로는 작곡 못 해’라고 말해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덧붙이며, 예전보다 점잖은 태도를 보였다. 여전히 그가 악동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낯설고 아쉬웠다. 새삼스럽게 그의 나이를 실감하며 ‘락스타는 늙지 않는다’라는 생각도 흘려보내게 된다. 대신 ‘락스타는 멋지게 늙는다’라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노엘은 인터뷰에서 데뷔 싱글 ‘Supersonic’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30년 음악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한 시간 만에 ‘Supersonic’을 쓴 밤”이라고 답했다. 수백만 명을 모은 공연도 아니고, 갖가지 시상식을 휩쓸었던 순간도 아니었다. 더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 많았을 테지만, 역시 시작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어느 날 밤하늘에서 뚝 떨어진 노래, 오아시스의 탄생을 알린 노래, 노엘이 오늘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 ‘Supersonic’은 2016년 동명의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다.

오아시스의 최고의 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 [슈퍼소닉]은 오아시스 ‘넵워스’ 공연 2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다. 오아시스가 2집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이후 투어가 한창이던 1996년. 그 해 여름은 어느 여름보다 뜨거웠다. 영국 넵워스에서 개최되는 록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 무려 25만명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영국 인구의 20분의 1, 무려 260만 명이 열광한 전설의 공연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공연으로 꼽힌다. 노엘 갤러거는 이 공연에 대해 “처음으로 겁이 났다”고 표현했는데, 맨체스터의 인디밴드가 불과 3년 만에 슈퍼밴드로 거듭났다는 사실이 확인된 최초의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슈퍼소닉]은 이 기념비적인 공연의 20주년을 기념하며, 밴드의 결성 과정부터 넵워스 공연을 개최하기까지의 스토리를 쫓아간다.

맨체스터 인디밴드에서 슈퍼밴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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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밴드 오아시스는 ‘Supersonic’이란 제목의 데뷔 싱글을 발표하며 순식간에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4개월 후 발매한 정규 앨범 ‘Definitely Maybe’는 데뷔 앨범 중 역대 최고로 빨리 판매된 앨범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달게 된다. 그렇게 영국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오아시스’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영국에선 “거지도 오아시스 노래를 흥얼거린다”는 풍문까지 만들어졌다. 도심 외곽의 변두리 지하연습실에서 시작된 이들의 노래는 한 도시를 넘어 국가를, 그리고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저 맨체스터 인디밴드였던 이들이 슈퍼밴드로 거듭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년이었다.

당연히 오아시스에게도 아마추어 시절은 있었다. 당시 리암 갤러거는 실업수당을 받으며 레코드를 샀고, 그렇게 산 레코드를 크게 틀어놓고 푹 빠져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리암은 자신의 스타성을 믿고 있었다. 뛰어난 작곡 능력을 가졌지만 앞에 나서지 않았던 형 노엘과 달리, 동생 리암은 ‘오아시스’라는 자신만의 밴드를 결성하여 맨체스터 인디밴드계를 누비고 다녔다. 타고난 프론트맨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리암의 밴드는 노엘이 쓴 곡으로 공연을 한다. 작곡만 하던 노엘이 처음으로 밴드 연주의 에너지를 체험하던 순간이었고, 머지않아 노엘도 오아시스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처음 노엘이 생각한 오아시스의 수명은 반년에서 1년이었다. ‘나 좋으라고’ 시작한 음악이기에 슈퍼밴드가 될 생각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떤 곡을 쓰면서 모든 게 변했다고 노엘은 회상한다. 이 장면에서 ‘Live Forever’가 흘러나오며, 자연스럽게 오아시스 히트곡들의 탄생 비화를 들려준다. 노엘에게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며 모든 것을 변화시킨 ‘Live Forever’부터 밴드 멤버들이 중국 음식을 먹는 동안 노엘이 완성한 ‘Supersonic’, 리암이 하루에 다섯 곡씩 녹음하던 당시 그 수많은 곡 중 하나였던 ‘Champagne Supernova’까지. 수십 년 동안 불려지는 명곡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당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대했는지 알 수 있다.

오아시스의 성공이 특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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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등장은 영국 음악계에도 특별한 귀감이 되었다. 당시 영국 음악계는 너바나와 펄잼 같은 미국 음악에 밀려, 자국 밴드의 계보가 끊기려던 참이었다. 그때 블러, 스웨이드, 펄프 같은 브릿팝 밴드들이 나타나 영국 음악계를 환기시켰다. 여기에 오아시스는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음악의 경쾌함에 브릿팝의 서정적인 정서까지 녹여냈으니, 그야말로 시대가 원하던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맷 화이트크로스 감독은 “사람들은 항상 음악을 사랑하지만, 온 나라 전체가 한 밴드의 매력에 빠졌던 것은 실로 오래된 일”임을 지적했다. 소셜미디어의 발전으로 모든 것이 쉽게 접근 가능하고, 가상현실화 되어버린 지금 음악계에는 그 어떤 신비로움도 없다는 의미다. 영화 [슈퍼소닉]은 모든 것이 개성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문제제기를 던지며, 당시 오아시스의 성공이 특별했던 이유까지 다룬다. 무엇보다 그 시대 밴드들이 특별했던 이유는, 온몸으로 부딪혔기 때문이다. 무일푼의 인디밴드가 이뤄낸 신화가 현 시대 시스템이 이뤄낸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이전의 시대였고, 오디션 리얼리티 쇼도 없었지만 꿈과 희망을 키워갈 수 있었던 시대. 넵워스 공연은 인터넷 탄생 이전의 마지막 대집결이었다.

비록 오아시스는 ‘형제의 난’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해체했다. 해체 이후에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형제가 오아시스의 중심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그들의 유대 관계가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도 사실이다. 미디어는 평생 그들의 애증 관계를 희화화했지만, 영화 [슈퍼소닉]은 그들 형제 사이에 분명 애증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