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서울독립영화제가 11월 30일 CGV 압구정에서 열렸다. 올 한 해 한국독립영화의 마지막 축제이자, 결산인 이 자리. 그만큼 많은 분들을 기대를 모은 신작도 발표되는 동시에,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독립영화들이 이곳에 모이기도 한다. 전주, 부천, 제천, 그리고 부산 등에서 먼저 공개되어 재미와 비평 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웰메이드 독립영화들이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난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해야 할 일]도 그렇다. 이번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장편 경쟁에 초청되어 주요 상영회차가 매진되는 등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현실감 있게 표현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열연, 서사적인 재미는 물론 보고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메시지까지. [해야 할 일]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봐야 할 일’로 바꾼 작품의 내공을 리뷰를 통해 미리 만나보자.

영화 [해야 할 일]은?

이미지: 명필름

[해야 할 일]은 구조조정을 앞둔 한 중공업 회사를 배경으로 정리해고 명단을 만들어야 하는 인사팀과 그 결정의 중심에 놓인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한양중공업 입사 4년차 대리 준희(장성범)은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고 인사팀으로 발령을 받는다. 부서 적응도 채 끝나지 않은 어느 날,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리기 위한 구조조정의 실무자로 일을 하게 된다. 함께 했던 동료들을 내보내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아이러니, 이 때문에 준희는 자신이 하는 일에 많은 혼란을 겪는다.

그럼에도 인사팀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구조조정 계획의 박차를 가하고, 준희 역시 하고 싶지 않아도 모두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는 스스로의 납득 속에 오늘도 엑셀 시트로 구조조정 기준을 마련한다. 하지만 일이 진행될수록 더 큰 딜레마가 준희와 인사팀을 압박한다.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과 마찰은 불가피하고, 회사 상부 역시 나름의 사정을 토로하며 지금 계획에 제동을 건다. 누군가를 해고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속에 잦은 야근과 휴일근무는 준희를 더욱 지치게 하고, 함께 근무하는 선배와 술 한 잔이 점점 무거워진다.

실제 인사팀에서 근무했던 감독 본인의 경험담

이미지: 명필름

[해야 할 일]은 실제 조선회사 인사팀에 근무했던 박홍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 역시 회사가 어려울 때 구조조정 관련 업무를 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해야 할 일]은 비슷한 소재의 작품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꼼꼼하게 관련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피스 장르에서 인사팀은 으레 악역을 전담한다. 더군다나 구조조정, 해고가 메인 소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들은 엄격한 기준과 방법으로 사람들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은 채, 오로지 회사 이익만을 위해 충실한 집단으로 묘사될 때가 많다. 냉정한 인사팀에 대항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이야기 중심에 놓인다. 그런데 바꿔 생각한다면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인사팀들 역시 마음이 무겁지 않았을까?

[해야 할 일]은 이런 지점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구조조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인사팀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그들의 업무를 어떠한 사심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다. 구조조정 대상자 리스트업, 해고 기준 수립, 대상자와 면담 등 오히려 이들의 프로세서를 담담하게 그린다. 어떨 때는 다큐멘터리 같다는 인상도 든다. 박홍준 감독의 경험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한층 더 강화하는 순간이다. 이런 효과 덕분에 영화는 현실의 이면을 있는 그대로 비춰내어 공감대를 높이고 생각할 거리를 더 많이 자아낸다. 픽션임에도 팩트인, 그 속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진짜 마음을 사려 깊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마음

이미지: 명필름

그렇다고 영화에서 갈등의 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인사팀에 추천한 상사에게 권고사직을 권하는 준희의 고민에서부터, 본인이 구조조정 리스트에 있는지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 결국 그 결정에 반발하며 집단 행동에 돌입하는 이들까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음에도 인사팀은 어느새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준희와 인사팀의 딜레마를 영화는 부국하기 보다 조금씩 삭히고 관조한다. 오히려 지금의 갈등은 여기가 아니라 회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태했던 더 높은 곳에 있음을 힘주어 말하면서 말이다.  

의외로 영화는 집단간의 충돌보다 이 같은 일을 묵묵히 할 수밖에 없었던 인사팀의 고뇌를 더 섬세하게 담아낸다. 내부 회의에서 자신들이 만든 엑셀 수식을 분석하며 친한 동료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선택들, 한때 친구, 가족보다 가까웠던 동료에게 그 결정을 말해야 하는 착잡함을 주인공 준희의 시선으로 깊이 있게 풀어간다. 자신의 아버지가 권고 사직을 받았는데, 그 전에 꽃다발이라도 드리고 싶어서 인사팀에 문의한 가족의 전화를 (참고로 이때 전화 속 목소리는 김향기 배우가 맡았음) 받고 울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 영화에게 가장 눈시울이 뜨거운 순간이다. 구조조정을 다룬 작품을 보고 사회 비판적인 요소보다 감성적인 떨림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은 필자에게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에도, 이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자 한계라는 체념과 함께 말이다.

배우들의 열연

이미지: 명필름

이 같은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건넨 바탕에는 영화의 주, 조연 배우들이 인상 깊은 연기가 큰 몫을 담당한다. [형사록] [신병 시즌 2] 등에서 존재감을 보여준 장성범은 주인공 준희를 맡아서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이끈다. 구고조정의 실무자로, 지금의 안타까움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준희의 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몇몇 부조리에 회사 선배에게 토로를 해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그 마음을 다듬는 인간적인 면모를 자연스럽게 내비친다. 장성범은 담담하지만 깊이 있는 영화 전체의 톤과 상당히 맞아 떨어지는 연기를 펼치고, 관객들의 시선을 대신한다. 그 결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며, 혼신을 다한 열연을 인정받았다.

장성범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구조조정의 실무적인 일을 진행하는 서석규, 김도영, 김영웅, 장리우 등 인사팀 직원 대부분 배우들의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 소화력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탄탄하게 다진다. 각자의 사연과 표정을 공감가게 보여주며 영화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특히 극중 인사팀의 수장으로, 냉정하게 실무를 수행하면서도, 지금의 현실을 뼈저리게 꼬집는 김도영의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회사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는 그의 마지막 대사는 작품의 뒷맛을 더욱 곱씹어보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별도로 한국독립영화의 힘을 다시 한번 보여준 작품이다. 구조조정, 해고라는 민감한 소재를 드라마틱한 장치로만 활용하지 않고 현실성 있게 풀어낸 구성과, 개성 보다 진솔함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캐릭터들, 무엇보다 극중 상황을 한 회사의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아닌 지금 시대의 씁쓸한 이면으로 풀어간 점 등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놓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의 고민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던 이야기이기에, ‘내일’과 ‘희망’이라는 말조차 내놓는 게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일터를 향해가는 이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가 묘하게 마음을 뜨겁게 데운다. 어쩌면 그 위로의 공감대가 작품이 지금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