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과 장르, 시대를 넘나드는 ‘언리미티드’한 기획을 통해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영화를 선보이는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에서 새해 첫 기획전으로 ‘에드워드 양 감독 특별전’을 2024년 1월 13일부터 1월 31일까지 개최한다.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거장 에드워드 양은 대만의 역사와 동시대의 풍경을 젊은이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삶을 통해 그려내었다. 현실을 담백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내는 에드워드 양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봉준호 감독 등 현재 동시대 영화사를 이끌고 있는 거장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영화를 통해 생의 의미를 포착하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대표작 다섯 편을 만나본다.

[해탄적일천] (1983) ㅡ 대만 뉴웨이브의 출발점

(주)에이썸엔터테인먼트

사랑을 포기하고 정략결혼을 택한 오빠의 불행한 인생을 지켜보다 집을 떠난 ‘자리’는 연인 ‘더웨이’와 타이페이에 정착하지만 결혼생활은 한없이 외롭고 위태롭다. 하루아침에 함께할 미래를 그리던 이의 손을 놓쳐버린 ‘웨이칭’은 유학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어 타이페이로 돌아온다. 귀국 공연을 몇 시간 앞둔 웨이칭에게 옛 연인의 동생 ‘자리’가 찾아온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은 간절할수록 잡을 수 없었던 사랑과 행복을 바랐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에드워드 양의 빛나는 데뷔작 [해탄적일천]은 음악가로 성공한 여인과 주부로 남은 여인의 오랜 관계를 쓸쓸한 톤으로 담아내었다. 주인공의 10대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오가며 여성과 대만 사회의 관계를 촘촘하게 수놓는다. 여기에 에드워드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영화적 요소 ‘공간’에 대한 치밀한 서사와 미장센까지 녹여내며, 대만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타이페이 스토리] (1985) ㅡ 쓸쓸한 도시 이야기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흘러가는 과거에 안주하며 방직공장를 운영하는 ‘아룽’과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타는 자유로운 사고의 커리어우먼 ‘슈첸’.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던 이 연인의 관계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타이페이 3부작’의 시작을 알린 [타이페이 스토리]는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주인공 ‘아룽’역으로 분하여 놀라운 열연을 펼쳤다. 영화는 1980년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혼란스러운 타이페이에서 살아가는 한 연인의 생과 운명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릴 만큼 급격하게 성장하는 대만의 도시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수시로 충돌하고, 그런 상황에 휩쓸리다시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쓸쓸한 도시 이야기다. 이 작품은 이후 제작되는 [공포분자]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큰 토대가 된다

[공포분자] (1986) ㅡ ‘공간의 사회학’의 정수

(주)에이썸엔터테인먼트

텅 빈 새벽, 총성이 울린다. 경찰 수사를 피해 도망가다 다리를 다친 혼혈소녀를 우연히 카메라에 담게 된 소년은 사진 속 소녀에게 점점 이끌린다. 그 무렵, 갑작스레 출세의 기회를 잡게 된 의사 ‘이립중’과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 아내 ‘주울분’은 권태로운 부부생활에 지쳐 있다. 이때, 소녀가 무심코 걸어온 장난전화를 아내가 받게 되면서 조용했던 일상들은 이윽고 기묘한 비극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받은 [공포분자]도 ‘타이페이 3부작’ 중 하나다. 권태기에 빠진 부부와 우연히 마주친 청년과 소녀를 중심으로,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를 냉정하게 그려냈다. 무심하고 건조한 일상들이 우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예상치 못한 파국을 만들어가는 형상이 안타깝고도 공포스러운 광경이다. 에드워드 양은 사회와 인간, 적막과 혐오의 속성들을 탁월하게 엮어내며 ‘공간의 사회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1991) ㅡ 아시아 영화사 최고의 걸작

(주)리틀빅픽쳐스

‘소공원’파와 어울리던 14살 소년 샤오쓰(장첸 분)는 양호실에서 샤오밍(양정이 분)이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는 ‘소공원’파의 보스 ‘허니’의 여자로, 허니는 샤오밍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조직인 ‘217’파의 보스를 죽이고 은둔 중이다. 보스의 부재로 통제력을 상실한 ‘소공원’파는 보스 자리를 두고 혼란에 빠지고, 돌연 허니가 돌아오게 되면서 ‘소공원’파 내부와 ‘217’파간의 대립이 격해진다. 그리고 샤오밍을 사랑하게 된 샤오쓰도 이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장첸의 데뷔작이며 에드워드 양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들어준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타이페이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1960년 전후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과 희망을 찾지 못하고 폭력에 젖어 드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렸다. 어두운 시대상과 쓰라린 성장기가 교차하는 이 작품은 3시간 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감수하면서까지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뛰어난 영상미와 음악으로 봉준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등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대만 뉴웨이브의 정점을 넘어 아시아 영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나 그리고 둘] (2000) ㅡ 사랑과 희망에 대한 식지 않는 열망

(주)리틀빅픽쳐스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8살 소년 양양은 아빠 NJ로부터 카메라를 선물 받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찍는 양양의 사진 속에는 사업이 위기에 빠진 시기에 30년 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 아빠 NJ, 외할머니가 사고로 쓰러진 뒤 슬픔에 빠져 집을 떠나 있게 된 엄마 민민, 외할머니의 사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누나 팅팅, 그리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담겨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진실의 절반’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에드워드 양은 “사랑과 희망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생에 대한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시대의 풍경을 담백하게 포착하되, 그 내면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이 에드워드 감독의 장점이다. 그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에도 이러한 시선이 가득 담겨 있다. 삶의 잔잔한 소용돌이를 겪어내는 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 인생의 이면과 내면을 사려 깊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내었다. 분리된 이야기를 일관된 전체로 엮어내는 섬세한 구성과 관조적인 시선으로 삶과 사회를 꿰뚫어내는 감독 특유의 연출이 가장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제53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하나 그리고 둘]은 에드워드 양의 유작이자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