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감독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신선함 혹은 현실성을 강조하고 싶을 때 잘 알려지지 않는 배우나 이전까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새로운 얼굴을 선택한다. 유명 배우로 단번에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유명세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전이나 다름없는 감독들의 선택이 언제나 성공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품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비전문배우를 만나 어느 때보다 더한 감정을 끌어내며 관객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극중 인물의 삶에 녹아들게 한 비전문배우들의 영화를 만나보자.

 

 

 

로마
이미지: 넷플릭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로마]는 혼란이 가득했던 1970년대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젊은 여성 클레오의 삶을 따라간다. 낯선 배우 얄리차 아파리시오가 맡은 클레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은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이도 개인과 시대의 비극을 절묘하게 관통하며 마음을 뒤흔든다. 감독은 자신에게도 멕시코 현대사에도 잊을 수 없던 1970년대를 재현하는데 실제 자신의 가족이 사용했던 소품을 공수하고,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밀도 있는 사운드를 완성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과 더불어 [로마]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얼굴은 생소하지만 진솔한 연기로 매 순간을 공명하는 얄리차 아파리시오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의 작은 마을을 돌아다닌 끝에 발견한 얄리차는 이전까지 연기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순박한 모습부터 절규의 순간까지 놀라울 정도로 정제된 연기를 보여주며 흑백 스크린을 풍부한 감성으로 물들인다. 그 결과 타임지에서 선정한 2018년 최고의 연기 TOP 10에 이름을 올렸으며, 쿠아론 감독으로부터 지금까지 작업한 배우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극중에서 클리오의 절친으로 나오는 동료 가정부 아델라 역시 비전문 배우이며, 얄리차의 실제 친구라고 한다.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
이미지: ㈜티캐스트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아메리칸 허니]는 2007년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에 영감을 받고 미국 8개주를 여행하며 얻은 경험에서 출발한다. 할리우드의 최고 스타에서 진짜 배우로 거듭나려는 샤이아 라보프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손녀의 꼬리표를 떼는데 성공한 라일리 코프가 든든한 조연진으로 합류한 가운데, 젊음 그 자체를 표현하는 주인공 스타 역에는 이전까지 연기 경험이 전무한 사샤 레인이 차지했다. 감독과 제작진은 스타 역에 적합한 주인공을 찾기 위해 봄방학 기간이면 수많은 학생들이 몰린다는 플로리다 해변을 찾아가 독특한 헤어스타일, 과감한 타투 등 자유분방한 매력이 눈에 띄는 사샤 레인을 발견했다. 텍사스에서 휴가를 즐기러 온 대학생이었던 사샤 레인은 이전까지 배우를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영화 같은 길거리 캐스팅으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에 참석하고 단숨에 할리우드와 패션계가 주목하는 라이징 스타로 부상했다. 물론 이는 날 것 그대로의 자유로운 에너지를 생동감 넘치는 연기로 표현하며 길 위의 청춘을 설득력 있기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발군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샤 레인뿐 아니라 스타와 함께 미국 횡단에 나서는 멤버들도 길거리 캐스팅으로 발탁됐는데, 이 같은 과감한 결정 덕분에 길 위의 젊음이 더욱 현실감 있게 보일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이미지: (주)디스테이션, (주)엔케이컨텐츠

 

[아무도 모른다]는 겨울이 되면 돌아오겠다는 엄마를 기다리는 네 남매의 이야기를 담담한 시선으로 담아내 만장일치의 찬사를 받았다. 비극적인 실화에 영감을 얻었지만, 사건에 초점을 맞춰 슬픔을 강조하는 대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네 아이들의 일상을 따라가며 먹먹한 여운과 함께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쉽게 가시지 않는 긴 여운이 자리하는 영화에서 아역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는 자연스럽게 네 남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이중 단연 눈길을 끄는 배우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돌보는 첫째 아키라를 연기한 아역 배우 야기라 유야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야기라 유야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출연한 첫 영화에서 기성 배우 못지않은 깊이 있는 (눈빛) 연기로 사로잡으며 탄식을 자아냈다. 촬영 당시 감독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위해 미리 구체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대신 현장에서 충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어린 배우들의 시선에서 연기가 나올 수 있도록 지도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감독 특유의 연출법 덕분에 배우들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었고, 야기라 유야는 첫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미지: 오드(AUD)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천진난만한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브루클린 프린스가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됐다면, 무니의 엄마 핼리를 연기한 브리아 비나이트는 좀 독특한 경로로 영화에 합류했다. 션 베이커 감독은 핼리를 맡은 유명 배우를 찾으면서도 망설이고 있던 차에 우연히 패션사업을 운영하던 브리아 비나이트의 인스타그램을 보게 됐고, 직접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 오디션을 제안했다. SNS 스타였던 브리아 비나이트는 아역 배우들과 대본을 읽는 오디션 과정에서 배우의 가능성과 열의를 드러내며 영화에 합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니의 친구 젠시와 스코티를 연기한 어린 배우들도 이전까지 연기 경험이 전무했다. 발레리아 코토(젠시 역)는 마트에서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던 중에 오디션 제안을 받았고, 크리스토퍼 리베라(스쿠티 역)는 가족과 함께 도로 모텔에 살고 있던 아이였다고 한다. 션 베이커 감독은 전작 [탠저린]에서도 사실성과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마이아 테일러를 발견했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
이미지: (주)미로스페이스

 

터키의 외딴 마을에서 평화롭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다섯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 [무스탕: 랄리의 여름]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끊임없는 찬사를 받았다.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의 완벽한 조화라는 평가를 받은 영화에서 개성 넘치는 다섯 자매를 연기한 배우들도 화제가 되었다. 데니즈 겜즈 에르쿠벤 감독은 프랑스와 터키에서 약 9개월간 오디션을 진행하며 자매를 연기할 배우들을 캐스팅했는데, 셋째 에체를 연기한 에릿 이스캔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기 경험이 전혀 없던 십대들이었다. 그중 툭바 선구로글루가 둘째 셀마 역으로 영화에 합류한 계기가 이색적인데, 다른 배우들과 달리 비행기 안에서 즉석에서 캐스팅됐다. 이스탄불-파리행 비행기를 탔던 데니즈 감독은 비행기 내에서 마주친 툭바의 첫인상에 이끌려 그 자리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요청했다. 신예 배우들을 모은 데니즈 감독은 촬영장에서 거리낌 없는 연기를 위해 배우들의 부모에게 어떤 연기를 하는지 상세하게 나열된 서류를 작성해 미리 논의를 구한 후에 촬영을 시작했다.

 

 

 

 

원스
이미지: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원스]는 우연히 만난 그와 그녀가 음악을 통해 사랑의 감정으로 향하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려낸 영화다. 적재적소에 흘러나오는 서정적인 음악과 얼굴은 낯설어도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영화에 더욱 진정성을 더했는데, 이는 바로 배우들의 특별한 배경 때문이 아닐까. ‘그’를 연기한 글렌 한사드는 아일랜드 인디밴드 ‘더 프레임스’의 보컬 및 기타리스트로 처음부터 남자 주인공을 맡을 계획은 없었다. 존 카니 감독의 제안으로 음악 작업에 참여한 그는 감독과 소통하며 영화의 색채에 맞는 음악을 완성해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글렌 한사드가 남자 주인공 역할에 제격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연기까지 맡기게 되었다. 먼저 캐스팅된 ‘그녀’ 역의 마르게타 이글로바는 글렌 한사드가 소개해 오디션을 거쳐 합류했다. 마르게타 이글로바는 동유럽에서 이민 온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여자 주인공 역할에 제격이었는데, 연기는 물론 음악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렇듯 외형보다 내실을 추구한 영화는 진솔한 이야기로 음악 영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트라이브
이미지: 오드(AUD)

 

대사와 자막, 음악 없이 오직 수화로 진행되는 [트라이브]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이야기를 파격적인 형식으로 담아내 주목을 받았다. 세르게이라는 소년이 청각 장애우 학교로 전학 가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배우들의 격렬한 몸짓과 속삭임을 통해 원초적이고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생소한 방식에도 깊은 몰입감을 끌어낼 수 있던 이유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 때문일 것이다.미로슬라브 감독은 영화를 위해 연기 경험이 전무한 청각 장애우들을 캐스팅하여 그들만의 강렬하고 표현력 넘치는 움직임을 통해 관객이 극중 인물들이 주고받는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단편영화를 작업할 당시 도움을 받았던 청각 장애우 문화센터와 SNS, 장애우 특수학교 등 캐스팅 작업에만 약 1년간의 시간을 할애하며 공을 들였다. 촬영 당시에는 아마추어 배우들로부터 생생한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일상 생활과 분리하는 규율을 만들고 끊임없는 리허설을 진행하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이미지: ㈜티캐스트

 

명장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는 밑바닥 청춘 로비가 우연한 기회에 위스키 감별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회성 짙은 주제를 다뤄온 감독의 영화답게 이번에도 하층민의 삶을 다루지만, 전작과 달리 유쾌한 웃음과 따뜻한 시선이 끝까지 즐거운 기분을 선사한다. 또한 실제 같은 배우들의 연기도 개성 넘치는 네 청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데, 극중 인물과 유사한 삶을 살아온 비전문배우를 섭외하여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낸 연출 방식 덕분에 가능했다. 청년 백수 로비와 백치남 알버트를 연기한 폴 브래니건과 게리 메이틀랜드는 이전까지 연기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이었다. 폴 브래니건은 로비처럼 감옥을 들락거리며 밑바닥 생활을 했던 과거를 지닌 인물로 사회봉사를 하던 중에 각본가 폴 래버티의 눈에 띄어 주인공으로 발탁됐고, 게리 메이틀랜드는 시청 청소부로 일하던 중에 켄 로치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다. 실제로 혹독한 현실을 살았던 두 배우의 경험과 진심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적인 메시지에 진정성을 더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