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핫’했던 드라마 [킬링 이브]의 원작 <킬링 이브: 코드네임 빌라넬>과 <킬링 이브: 노 투모로>를 읽을 기회가 생겼다. 소설을 읽다 보면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도 재미있겠다” 싶은 작품이 있기 마련인데, 드라마 시리즈를 아직 보지 않은 에디터에게는 이 시리즈 역시 영상화가 궁금해진 작품 중 하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2014년 <킬링 이브: 코드네임 빌라넬>의 전신인 중편 시리즈를 킨들에서 접한 독자들도 이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 같기도 하다(단행본 출판은 2018년).

 

전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쫓고 쫓기는 첩보전이나 사이코패스 암살자라는 소재는 인기가 있는 만큼 그동안 여러 곳에서 자주 다룬 소재다. 그러나 ‘남자의 전유물’이라 불릴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장르이기도 했는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한들 성적으로 묘사하거나 미숙함을 희화화 한 작품이 많아서 아쉬움을 느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직 2권까지 밖에 국내에 정식 발매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킬링 이브> 시리즈는 첩보물의 전통과도 같았던 요소들을 보기 좋게 뒤틀면서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는데, 이 중심에는 캐릭터가 있다.

 

우선 빌라넬을 살펴보자. 빌라넬은 ‘12 사도’라 불리는 미지의 단체의 암살자로 거듭난 인물이다. [니키타]의 니키타, [미션 임파서블]의 일사 파우스트처럼 고도의 훈련을 받은 여성 암살자/요원이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은 이제껏 많이 봐왔다. 그러나 단순히 ‘임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재미’를 위해 목표를 제거하는 사이코패스스러운 면모를 보인 캐릭터는 대개 남성들이 맡았기에 <킬링 이브>에서 캐릭터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거기에 살인에 대한 갈망을 섹스로 대신 충족시키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놓칠 수 없는 통제 욕구까지 가진 캐릭터라니,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빌라넬을 뒤쫓는 이브 폴라스트리는 어떨까? 가정에 소홀하거나 가족에게도 정체를 숨겨야 하는 정보국 요원이라는 설정도 미디어에서 숱하게 봐온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 [트루 라이즈]가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가족이 위험에 빠지거나 주인공과 갈등을 겪는다는 설정도 자연스레 따라붙게 되는데, 이런 캐릭터가 대개 남성으로 묘사되어 온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이브가 돋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에서 온다. 사이코패스 암살자가 집착하는 대상이자 가장 큰 위험요소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는 점은 이야기에 묘한 매력과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이미지: BBC America

 

<킬링 이브: 코드네임 빌라넬>이 옥사나 보론초바가 사이코패스 암살자 빌라넬이 되는 과정에 집중하면서 그녀를 뒤쫓는 MI5(영국 정보부 보안국) 요원 이브 폴라스트리의 이야기가 ‘서브 스토리’처럼 흘러갔다면, <킬링 이브: 노 투모로>는 이브의 추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브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내일은 없다’라는 제목이 매일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는 이브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도 <킬링 이브> 시리즈의 재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킬링 이브: 노 투모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빌라넬과 이브의 심리와 성적인 긴장 관계에 있다. 전작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은 한 번, 그것도 상대방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황에서의 조우가 전부였다. 반면 <노 투모로>에서는 작중 전반부와 후반부에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데, 비록 두 번이지만 이 시점을 계기로 집착의 정도가 바뀐다.

 

빌라넬은 실패한 첫사랑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이브에게서 느낀다.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대상에게서 느꼈던 강렬한 통제 욕구가 이브를 향한 집착으로 변한 것이다. 이브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이전까지 빌라넬은 그저 ‘잡아야 하는 미지의 인물’, ‘자신의 동료를 죽인 범죄자’에 불과했지만,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어느새 그녀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과 함께 연인에게서나 느낄 법한 성적인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양 극단에 위치한 적대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펼쳐지는 두 사람의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쫄깃쫄깃한 긴장감을 유지해서 좋았다.

 

<킬링 이브> 소설 시리즈는 한 자리에 앉아서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신선한 작품이다. 드라마를 보고 봐도 재미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더라도 상당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첩보물과 다른 매력의 작품을 보고 싶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이 작품을 찾아서 읽기를 바란다.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문체,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에 빠져 어느샌가 유럽 각지를 누비며 생사를 오가는 임무에 몸 담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