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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봄동

코로나19의 창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2020년은 ‘새로운 10년의 시작’ 치고는 유난히 힘겹고 슬픈 해로 남을 듯하다. 채드윅 보스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부터 정확히 3주가 지난 9월 18일(현지시간), 여성과 소수자의 수호자 혹은 대변인으로서 평생을 바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 향년 87세로 영면에 들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방식만 다를 뿐 이기든 지든 각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버텨 내는 ‘긴즈버그’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은 가시밭길임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걸어가는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을 한 명씩 되짚어본다.

비밀의 숲 – 한여진 (배두나)

불의를 그냥 봐 주지 않는 용산경찰서 강력반 형사 한여진이 [비밀의 숲2]에서 경찰청 경감으로 돌아왔다. 전 시즌에서 검찰 조직 내 비리를 놓고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렸던 그가 이번에 마주한 벽은 수사권 조정에 대한 검경의 첨예한 줄다리기. 황시목과의 재회에도 눈길이 가지만, 여진이 수사구조혁신단 직속 상사 최빛과 빚어내는 티격태격 케미야말로 시즌 1 속 ‘이창준X황시목’의 묘한 관계에 맞먹는 활력소가 되어 준다. 하지만 시목이 이미 이창준을 상대하며 겪었듯이, 시즌 2 종영 즈음에는 여진도 동경하는 선배 최빛과 자신의 정의를 저울 위에 놓고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현실의 대한민국에서도 결코 녹록지 않은 수사권 조정, 한여진은 과연 이 늪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니게임 – 이혜준 (심은경)

이혜준은 최근 등장한 드라마 주인공 중에서 삶의 굴곡이 가장 가파른 이 중 한 명이다. 아버지는 IMF 외환위기로 나락에 빠진 끝에 자살하고, 혜준은 고모 슬하에서 자라며 아버지처럼 불평등의 굴레에 매이기 싫어 악착같이 공부한다. 결국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 사무관으로 당당히 입사하며 꿈꾸던 인생이 열린 듯했지만, 직장 내 견고한 3중 차별(학벌·집안·성별)을 당하면서 어린 시절에 목격한 냉혹한 현실을 다시 실감한다. 그럼에도 혜준은 부조리 앞에 절대 무릎 꿇지도, 적당한 타협을 시도하지도 않은 채 월가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바위 앞의 계란’ 같은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고난과 성장으로 점철된, 흔하디흔한 영웅 서사이지만, 아무 반감 없이 응원을 보내게 된 건 꼬꼬마 시절부터 다져진 심은경의 깊은 내공 덕분이다.

스토브 리그 – 이세영 (박은빈)

이세영이란 캐릭터는 역시 아역 출신으로 성인 연기자로서도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박은빈의 터닝포인트라 할 만하다. 프로야구 리그의 유일한 여성·최연소 운영팀장임에도 앳된 얼굴과 작은 체구 탓에 위엄이 없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일에 거침없이 덤벼드는 그는 맹수나 다름없다. 세영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믿고 지켜주려는 의지다. ‘노빠꾸’ 신임 단장 백승수와는 처음부터 전혀 안 맞는 사이 같았지만, 만년 꼴찌 드림즈를 성공으로 끌어가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된 것이 그 증거다. 팀 동료들에 대한 세영의 믿음과 책임감은 승수의 동생 영수를 전력분석팀 팀원으로 채용하는 과정에서 더욱 빛난다. 세영이 날린 사이다 중에서도 최고의 명대사는 동생의 장애를 지적한 승수에게 “드림즈는 차이를 가지고 차별하지 않을 겁니다”라며 날린 일갈이 아닐까.

동백꽃 필 무렵 – 오동백 (공효진)

엄마에게 버려진 고아, 미혼모, 술집 사장, 연쇄살인의 유일한 생존자…평생을 동네 사람들의 온갖 꼬리표로 덮인 채 살았지만, 오동백은 겨울 추위를 뚫고 선명한 붉은빛을 피워 내는 동백꽃 그 자체다. 자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마냥 소심하게 받아 내기만 하면서도 “웬만하면 사람들한테 다정하고 싶다”고 토로하는 동백의 내면은 존경을 넘어 찬양하고 싶을 정도다. 이렇게 선하고 강한 인물이니 정의에 죽고 사는 황용식이 불도저처럼 동백에게만 직진하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용식과의 알콩달콩 사랑도 보기에 참 좋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이 2019년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은 건 동백이 깊이 감춰 둔 속내를 표현하고 또 성장해 가는 기적을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시켰기 때문이리라.

눈이 부시게 – 김혜자 (김혜자/한지민)

작년 초 방영된 JTBC [눈이 부시게]는 시간 여행 코미디로 시작해 결말로 갈수록 시청자의 눈물 콧물을 펑펑 터뜨린 충격적인 드라마였다. 나이와 경력을 뛰어넘어 극강의 싱크로율을 보여준 김혜자와 한지민의 2인 1역 연기는 그저 대단했다. 무엇보다 미디어에서 개그 소재 등으로 희화화되기 일쑤였던 치매(알츠하이머) 환자를 이야기의 핵심에 두고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 혜자는 비록 앞서 언급한 캐릭터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투사(鬪士)의 전형이다. 남편을 잃은 후 본인의 꿈(아나운서)을 접고 장애인이 된 아들을 홀로 키운 그는 모진 바람에 휘청거릴지언정 절대 뿌리 뽑히지 않은 거목과도 같았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화 엔딩에 삽입된 김혜자의 내레이션은 누가 들어도 진정한 승자의 선언이다.

에디터 봄동: 책, 영화, TV, 음악 속 환상에 푹 빠져 사는 몽상가. 생각을 표현할 때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내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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