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소년들의 로망일지도 모른다. 보지 않은 것,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치열한 욕망말이다. 어릴 적 장난감 로봇을 갖고 놀며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꿈을 꾸고, 무협영화를 보고나선 이를 따라하다가 물건을 깨뜨리거나 다치곤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어깨에 힘이 자연스레 들어가곤 했다. 영화 속 인물과 나를 동일시하고 영웅이 되는 상상에 꿈속에서도 히죽 웃게 되는 것. 그게 바로 동심이었고 닿지 못한 상상 속 꿈과 희망이기도 했던 거다. 굳이 하나를 덧붙이자면 내 눈 속에 깊이 담아둔 공룡의 세계도 그 중 하나였다.

엄마가 품에 안겨준 ‘공룡의 신비’라는 과학학습만화는 아이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페름기, 쥐라기, 백악기 등의 시대를 돌아다니며 공룡을 만나는 우여곡절의 이야기를 다뤘다. 쉽게 접하고 이해하기 힘든 과거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적절한 기회이지 않았을까. 어느 날 친구 녀석과 함께 들른 영화관에서 이러한 것들이 구체화, 입체화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존 윌리엄스가 만든 웅장한 사운드트랙을 등에 업고 브라키오사우루스가 앞발을 내리찍는 그 장면. 이를 바라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앨런 그랜트(샘 닐 분)와 엘리 새틀러(로라 던 분), 그리고 이보다 일찍 만났던 [더 플라이](1986)의 주인공 이안 말콤(제프 골드블럼 분)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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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공룡의 모습을 마주하는 그 순간의 감격은 관객석에 앉아있는 나조차도 무언가에 홀린 느낌을 갖게 만드는 마법이 주어진 것 같았다. 그게 공룡의 힘이었고, 어릴 적 꿈꿨던 희망이 비로소 현실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던 거다. 1993년의 어느 날, 영화 [쥬라기 공원](1993)이 내게 미친 영향은 그토록 묵직하고 너무나 강렬했다. 이야기를 좀 더 당겨보자. 영화사에 엄청난 쇼크로 다가왔던 이 작품은 심형래 감독의 영화 [용가리](1999)와 [디 워](2007)를 거쳐 세계관을 이어가는 시리즈는 물론, [쥬라기 월드](2015)에 닿기까지 계속해서 그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선사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평소 가까이하기조차 어려웠던 쥐라기 시대의 엄청난 동물들을 비로소 하나씩 훑어보고 이해하게 된 거다.

영화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2022)은 이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에 대한 추억을 현재로 끌어오고자 지나치게 노력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각 씬마다 1993년의 향수를 구석구석 새겨 넣어, 덕분에 과거에 추억을 남겨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간을 안겨주지 않았나 싶다. 영화의 주제는 [쥬라기 공원]이 가진 키워드, 즉 ‘통제’를 넘어 인간이 쉽게 넘보지 못한 ‘공존’이라는 것에 대한 해석을 계속해서 갈구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해 과거를 경계하는 게 아닌 미래를 고려한 공존으로 이해하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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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슨’이란 이름이 등장했을 때부터 이 방향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데니스 네드리(웨인 나이트 분)가 개조된 면도크림 통을 받아들고 “다지슨! 다지슨이 여기 있어요!”를 외치던 그 장면을 여태껏 잊지 않고 있어서다. 영화는 잠시 스친 다지슨(캐머런 소어 분) 외에도 앨런, 엘리, 이안 3인방과 [쥬라기 월드]의 오웬(크리스 프랫 분), 클레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분) 등의 인물을 조합해, 그야말로 공룡 시대의 초절정을 형성하고 나선다. 간간이 들려주는 옛 사운드트랙의 리듬과 선율까지도 함께 말이다.

이처럼 영화가 던지는 주된 메시지는 이안이 초반 강연 장면에서 주장한 ‘혼돈이론’의 그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불규칙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규칙과 안정을 설명하는 이 이론은, 공룡들의 생태계를 이해하고, 현대사회의 문명과 인위적인 통제가 결코 이를 넘어설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모습이다. 사실 그 동안 쭉 이어온 이 영화의 시리즈는 공룡의 세계 또한 질서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 자연스러운 통제가 존재함을 수차례 주장해왔다. 얼어붙은 호수, 바다 등 ‘물’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해, ‘불’이 붙은 메뚜기 떼 화재로 장면을 전환시켜가는 방식 등은 자연스레 정합(整合)을 이뤄 자연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통제가 형성되고 있음을 넌지시 던지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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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트레보로우 감독의 [쥬라기 월드]는 예전부터 이처럼 ‘통제’와 ‘공존’이란 화두를 계속해서 강조해온 모습이다. 오웬이 랩터 훈련사로 등장하긴 했어도, 그 과정과 방식은 통제가 아닌 교감이었고, 조련이 아닌 훈련이었다는 점에서다. 이 속에는 눈으로 쉽게 해석되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희망과 변화를 갈구하고 있음이 포함된다. 오웬이 랩터 블루와 직접적인 약속을 하는 것도 어쩌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종(種)과의 공존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영화는 거대 영역의 헤리티지를 계속해서 잇고자 하는 하나의 근거를 계속해서 내세우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향수를 끄집어내어 다시 한 번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한 점은 독특하면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단지 과거의 추억만을 꺼내왔다면 구태의연한 그것과 다를 바 없겠지만, 향수를 기반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체화, 입체화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랩터가 사람들을 사냥하기 위해 삼각편대를 형성해 공격했다면, 이번에는 랩터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삼각편대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과거의 향수에 지나치게 갇히지 않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의지를 보여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더해진다고 하겠다.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그렇다면 영화는 사람들이 간직한 과거 ‘쥬라기 공원’에서의 추억을 통해 단지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내러티브만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오히려 이와 반대로 어두운 미래를 넘나드는 하나의 경고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혼돈이론이 미래를 쉽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공식을 투척했다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미래 또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 메뚜기 떼의 반란뿐만 아니라, 메이지(이사벨라 써먼 분)가 가진 정체성 또한 불완전한 인류를 보완하는 시도에서 가져왔다.

결국 영화는 과거로부터 가져온 보따리를 곳곳에 풀어놓은 채 이를 통해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인류의 자세를 짜임새 있게 경고한다. 스케일이 보여주는 견고함이나 화려한 장치가 전부가 아닌, 그 안에서 현재를 비추고 미래를 해석하는 시선이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우리에게 공룡이 줄 수 있는 건, 단지 액션과 공포, 자연의 신비가 전부가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숙제가 아닐까. 후회는 역사라는 이름의 과거 속에 계속해서 갇히게 되는 그 어두운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