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이미지: CGV 아트하우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혹은 귀에 들리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 이도 저도 아니면 마음속에 자리하는 것과 자리하지 않는 것. 이를 좀 더 얘기하자면 ‘존재’와 ‘부존재’의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청춘에게 꿈은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을까. 분명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마음속에 형상도 틀도 없이 그저 공허하게 흔들릴 뿐이다. 여기서 ‘존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존재’는 이런 의미에서 분명 ‘공유’되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나도 인식하고 너도 인식하는 것과 나도 인정하고 너도 인정하는 그것. 서로가 이를 공유할 때, 바로 그 시점부터 ‘존재’의 의미가 형성되고 가치가 주어지는 게 아닐는지.

이창동 감독이 가져온 영화 [버닝](2018)이 던지는 주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과는 또 다른 형태의 이야기를 펼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해서 제시하는 ‘존재’와 ‘부존재’의 개념. 그리고 이의 차이와 그사이에 자리한 ‘왜’라는 질문도 그중 하나다. 종수(유아인 분)는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다. ‘존재’와 ‘부존재’의 개념을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경계의 그림자를 지닌 인물이다. 그의 시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현실이 때론 생각의 틀 속으로 자리하기도 하고, 그 생각이 때론 현실로 비집고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지: CGV 아트하우스

오랜 친구 해미(전종서 분)는 어느 날 성형수술을 하고 종수 앞에 나타난다. 85번의 행운이 준 손목시계는 그에게 건네졌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저녁 술자리에서 대뜸 아프리카로 떠날 것을 얘기한다. 오랜만에 만나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자유로운 삶을 지향한다고 말했던 것과 부합하는 얘기이다. 그런데도 종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다가온 85번의 당첨 사실처럼 다소 낯설기만 하다. 앞에서 말했듯, 그는 소설을 쓰며 생각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익숙하다. 해미와의 오래된 하지만 낯선 만남은 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켜 나간다. 해미는 저녁 술자리에서 종수를 앞에 두고 팬터마임을 선보인다. 눈앞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면 된다는 그.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존재’와 ‘부존재’의 개념을 계속해서 정의하게 만드는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종수는 그런 그를 보며 해미의 존재 여부가 가진 가치를 새롭게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인생에 있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해석해야만 하는 새로운 숙제가 주어진 것이다. 이는 영화의 제목이 드러내는 ‘버닝(Burning)’의 의미와도 연결되는데, 존재하는 것에 대한 ‘나’의 현실적인 개념이 되기도, 혹은 부존재를 위한 ‘태움’의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존재’와 ‘부존재’의 경계를 수차례 섬세하게 넘나든다. 해미는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 있는 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고양이 ‘보일’의 밥을 챙겨 달라는 부탁을 한다. 두 사람이 그의 방에서 함께 하는 정사 장면(Scene)에서 종수의 시선이 구석의 비어 있는 공간을 가리키는 건 하나의 의미를 던진다. 마치 비어 있는 공간 속 보이지 않는 시선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존재’와 ‘부존재’의 개념에 대한 그의 시선은, 그가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 등장한 의문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과 그가 펼쳐낸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 이야기를 통해 확장된다. 그가 이야기와 춤을 통해 펼쳐내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설명은, 둘이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점차 발전되어가는 영역을 가지는 듯하다.

어쩌면 이건 종수의 상상일 수도, 또는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표현되는 계층의 간격일 수도 있겠다. 내러티브 속에서 너무나 솔직하게 표현되는 종수와 벤과의 대립 구도는, 이처럼 가지지 못한 이의 상대적인 항거로 표현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양분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펼쳐지는 종수의 반란이 해미의 방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소설 습작 장면을 통해 앞과 뒤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어서다. 결국 해미의 존재는 그가 남긴 말처럼 존재하고 있던 사실을 잊으면 되는 걸로 결부되고, 이는 해미의 ‘존재’와 ‘부존재’의 경계가 이를 스스로 태워냄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걸로 해석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영화는 여러 장면을 통해 줄곧 ‘비어있는 것’에 대한 응시를 드러낸다. 이에 대한 의미는 공허함도 아니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허공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오히려 비어있다는 것, 그게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어떤 행위와 무관한 게 아니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듯하다. 종수가 해미의 빈집에 들어설 때 화장실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고양이 ‘보일’은 여전히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빈집임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불이 켜져 있는 건, 이 또한 비어있는 것에 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다. 독특한 기시감처럼 느껴지는 이와 같은 장면의 반복은 앞에서 언급한 ‘존재’와 ‘부존재’의 경계를 희석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미지: CGV 아트하우스

결국, 이창동 감독은 관객에게 계속해서 현실과 상상, 그 경계가 사회 속에서 확연하게 구분되고 하지만 어떤 시각에서 이들이 희석될 수 있다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계층 혹은 계급사회에 대한 직시일 수도, 또는 그 경계에서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는 젊은 청춘의 표상이 될 수도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벤은 그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울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한편, 자신의 직업이 노는 거라고 얘기하면서 요즘은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경계가 없어졌다고 태연하게 얘기한다. 이 또한 사회적 경계의 파괴를 현실적으로 드러낸 대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다.

미국 남부 출신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남북전쟁에 대한 그의 시각을 통해 남부 고유의 문화를 자주 다뤘으며, 자연스레 이의 쇠락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펼친 바 있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밝힌 종수의 시선이 이를 따라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태우는 것의 행위가 곧 계층이 가진 경계의 파괴를 의미하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이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처럼 말이다. 종수는 어릴 적 아버지가 시킨 대로, 엄마가 집을 나간 날 엄마의 옷을 태워버린 기억을 꺼낸다. 이 또한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아닌 종수 자신이 태움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CGV 와트하우스

해미에게 아무 데서나 옷을 벗지 말라고 얘기하던 종수. 마지막 장면에서는 반대로 그가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 젖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차 운전석에 앉아 떠나버리는 그의 뒷모습에서, 이미 기울어진 경계의 희석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영화는 이에 대해 강렬한 화두를 던지는 모습이다. 그건 파괴적이지만 무엇 하나 파괴하지 못하고, 구체적이지만 확연하게 구분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국 열린 결말이 던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보는 이들의 비어 있는 마음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부존재의 존재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