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주)디오시네마

제작 취지만 좋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이재호 감독이 만든 [동행 : 10년의 발걸음, 이하 [동행]]은 시각장애인으로만 구성된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가 지나온 10년의 여정을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은 관악기는 몰라도 현악기까지 잘 다루기는 몹시 어렵다. 더욱이 시각장애인 ‘관+현악’ 오케스트라는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가 조직되기 전엔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이었지만, 2011년 명선목 당시 광명복지재단 이사장은 보란듯이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시각장애인들은 할 수 없다’는 편견에 맞서려는 의지를 명 이사장은 영화 곳곳에서 보여준다.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 섭외 과정에서 오가는 말들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단원들에게 탈을 씌우자 하니 발끈 화를 냈다 하는 대목이다. 시각장애인을 만만히 보는 줄 알았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 믿고 이를 증명하려 한다. 이 믿음에 따라 단원들은 시각장애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악보를 통째로 외워가며 연주회에 관객들을 불러들였다. 감독은 특정 음악회에서 연주한 몇몇 무대들을 편집하지 않고 통째로 영화에 넣었다. 영화가 음악에 대한 예의와 연주자들에 대한 예의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래서 지난 1일 개봉한 [동행]은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겨 우리 사회의 장애 인식을 개선하려는 작품이다. 일단 취지가 좋다.

이미지: (주)디오시네마

아쉽지만 호평은 여기까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를 오랫동안 애정 어리게 지켜봐 온 나로서는, 일 년에 몇 편 개봉하지도 않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고 들뜬 마음에 영화관을 찾았다가, 영화 연출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적당한 소재를 발굴해 편하게 제작하려는 작품들을 보게 될 때마다 꽤 불편하다. 이런 작품들은 쉽게 소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는 오래 전부터 정치 권력에 저항하며 성장해왔고, 그래서 진보 진영의 담론 또는 휴머니즘을 수용하거나 앞세우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사회적 가치나 인류보편적 가치를 영화의 중심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고, 이때마다 비평은 곧잘 위축되곤 했다. 영화에 대해 평가를 했는데 이를 곧장 소재가 된 인물 또는 대상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가 스스로 지레 몸을 사리는 경우도 있다. 2010년대 중반에 제작된 일련의 ‘노무현 다큐’가 대표적인 예다. 전인환 감독의 [무현, 두 도시 이야기](2016)와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입니다](2019)가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거두기 힘든 흥행 성적을 기록하자, 이어 개봉한 [노무현과 바보들](김재희, 2019)과 [시민 노무현](백재호, 2019)은 노 전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서사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채 미학적 성취는 외면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주체가 노 전 대통령의 스크린 파워를 새삼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남긴 푸티지 영상과, 그의 최측근이던 사람들 인터뷰로만 영화를 채웠다. 선악을 단순하게 설정하고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노력 자체를 생략한다. 문제는 그렇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 흥행 스코어로는 적지 않은, 1만에서 2만 명 수준의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았다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곧장 이념 또는 진영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고 그 바람에 비평이 바로서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이 거둔 상업적 성취는 영화의 만듦새 대신 노 전 대통령이라는 인물 서사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꼭 다큐멘터리 영화에만 해당하는 기준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 [해운대](윤제균, 2009)는 대규모 CG를 동원한 한국형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로 입소문을 타 천만 관객을 넘어섰지만, 영화 곳곳에서 관객을 기만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설정했던 극중 하지원의 부친 제사를 감독 마음대로 한여름에 모신다든지, 한바탕 쓰나미가 몰아쳐 건물마저 떠내려가는 모습을 직전까지 보여주고도 주인공이 재난현장에서 접시를 수습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장면들을 연출해도 관객들만 교묘히 속여 돈만 많이 벌면 되고, 스케일 큰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볼 사람은 결국 본다는 식이 바로 ‘소재주의’다. 관객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영화를 이렇게 만들고서 많이 봐달라는 말이 나오느냐는 말이다. 그런 작품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물론 그렇다. 하지만 기왕에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다음에야, 작품이 가진 한계 역시 같이 언급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직업의식을 느낀다.

이미지: (주)디오시네마

다시. [동행]은 말의 향연이다. 인터뷰가 차고 넘친다. 이 인터뷰들이 향하는 지점은 결국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겪어왔는지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말로 설명해서 될 게 아니다. 단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영화가 보여줘야 한다. 정작 그들이 흘린 땀은 생략하고, 단원들을 외곽에서 지원했던 사람들이 생색내는 식으로 인터뷰를 자꾸 치고 들어와서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중간에 불쑥 들어오는 정치인도 감상을 방해한다. 돌려 말하는 것 같지만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의 창단에 자신도 한몫 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지역성까지 내세운다. 이러다 보니 어느 순간엔 연출자의 작품 기획 의도마저 수상하게 보인다.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 단원’을 앞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다.

이 의심을 거둔다 하더라도 [동행]의 인터뷰 나열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 인터뷰로 말을 아무리 잘해봐야 단원들의 ‘피 땀 눈물’을 다 담아낼 수 없다. 인터뷰이의 말들이 하나의 주제로 모이지 않는 시퀀스도 있다. 인터뷰이의 발언들을 최대한 살리려 하다가 이 말도 영화에 넣어 주고, 저 말도 영화에 넣어 주는 바람에 발생한 결과다. 그러다 보니 [동행]은 유감스럽게도 눈을 감고 보아도 되는 영화가 됐다. 말로 설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우리나라에 시각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꽤 고생했겠더라’ 하는 식의 일차원적인 감상뿐이다. 감독이 혹시 관객들로 하여금 이런 정도의 감상을 바랬던 것인지 궁금하다. 혜광브라인드오케스트라 창단 10주년에 깊은 존경을 보내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고생한 단원들을 생각해서라도, 영화를 이렇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